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전쟁 때는 그의 부장(副長)으로 신뢰를 받았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 요약 고대 로마의 정치가로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성립하였다.
동방원정에 전념하여 여러 주를 장악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쌓았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아내로 삼고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해전에서 패하여 자살하였다.
출생-사망 | BC 83.1.14 ~ BC 3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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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고대 로마 |
활동분야 | 정치 |
BC 57년부터 A.가비니우스의 부하로 동방원정(東方遠征)에 종군하여 무훈을 세우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전쟁 때는 그의 부장(副長)으로 신뢰를 받았다.
BC 49년 호민관(護民官)이 된 뒤부터 로마에서 활약하였고,
카이사르 대 폼페이우스의 내란에서는 은의(恩義)를 입은 카이사르의 한 팔이 되어 그를 도왔다.
BC 44년 콘술(집정관)이 되고, 그해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그의 유언장을 발표하였다.
추도연설에서 민심을 선동하고 암살자들과 타협하면서 그들이 실권을 장악할 길을 봉쇄하는 한편,
동시에 카이사르의 세력기반(로마의 대중 ·병사)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출현으로 그의 지반이 잠식되고, 이
에 편승한 공화파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며,
합법적으로 허용된 북이탈리아의 군사력을 장악하는 일마저 실패,
결국 남프랑스 지방으로 피신해 카이사르의 유장(遺將) M.A.레피두스와 합류하였다.
BC 43년 말에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더불어 ‘국가건설 3인위원’으로서 제2차 3두정치(三頭政治)를 성립,
반대파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BC 42년 필리피전투에서 M.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이기고 마지막 승리를 거두어 이름을 떨쳤다.
BC 40년 삼두정치의 결속을 재확인하고,
BC 37년 그 임기를 연장하여 동방원정에 전념하였다.
BC 30년대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를 포함하는 5인의 왕의 대(大)패트런(Patron)이 되었고,
로마 지배하의 여러 주(州)를 장악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쌓아 디오니소스의 신(神)으로 숭배받았다.
그러나 레피두스가 실각한 뒤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둘 사이의 결속을 강화하고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를 아내로 맞았으나,
이미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옥타비아와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클레오파트라와는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애인으로 삼아 그녀와 그녀의 아들과 딸에게 광대한 영토를 나누어 주는 등,
본국 로마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을 집행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깊은 사랑에 빠져 동방을 통치하는 사령관으로서 본분을 망각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출정에서 패배하자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를 비롯한 원로원 등 고국의 신임을 잃었고,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결전을 벌였다.
BC 31년 9월 에피루스 해안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海戰)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대패하여
이집트로 도망쳤는데,
다음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삼두정치에서는 항상 우위를 유지하였고
동방원정도 로마의 국가적 요구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이집트에서의 그의 방종이 지나쳤고
대웅변가 M.T.키케로를 적으로 만들어, 패배자로 끝을 맺고 말았다.
[ë¤ì´ë² ì§ì백과] 안토니우스 [Marcus Antonius]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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