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청일전쟁 후 조선 정부는 10년을 허송세월했다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⑦ 대한제국과 잃어버린 10년
1929년 중국 하북성 제1공창이 제작한 ‘중화 국치 지도(中華國恥地圖)’. 그때까지 300년 동안 외세에 의해 상실한 중국 실지(失地)를 표시한 지도다.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제국(諸國)에 빼앗긴 영역을 표시한 ‘국치 지도’는 1916년 중화제국 황제를 자칭한 원세개에 의해 제작이 시작됐다.
그런데 조선 또한 ‘실지’로 표시돼 있고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독립을 허락 받고 1910년 일본에 멸망’이라고 적혀 있다. /미국 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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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⑦ 대한제국과 잃어버린 10년
1911년 신해혁명이 터졌다. 이듬해 청나라가 붕괴됐다. 이어 건국된 중화민국은 혼돈을 거듭하다 1916년 중화제국으로 바뀌었다. 황제는 원세개였다. 원세개가 북경에서 황제를 자칭하는 사이 각 성(省)이 서로 독립을 주장하며 대륙은 내전 일보 직전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위기에 몰린 원세개 정부는 상해 중앙여지학회(中央輿地學會)를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희귀한 지도를 제작했다. 지도 이름은 ‘中華國恥地圖(중화국치지도)’다. 청 왕조가 겪은 국난과 치욕을 교훈 삼아 내전으로 외세에 어부지리를 주지 말자는 교훈적 지도다.
원세개가 죽은 뒤에도 1931년까지 중국은 도처에서 ‘국치 지도’를 만들어 반(反)외세 투쟁에 활용했다.(梁二平, ‘中國海圖史’, 開明書店, 홍콩, 2021, p492)
그 지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지도를 보라. 부서져 불완전하고 원수들은 바다처럼 깊고 치욕은 산처럼 무겁다. 바라건대 우리 동포는 노력에 또 노력해 중화의 앞날 억만년을 만들라(請看此圖殘破不完 仇深若海耻重如山 願我同胞努力勉旃 中華前途億萬斯年·청간차도잔파불완 구심약해치중여산 원아동포노력면전 중화전도억만사년)’
그리고 지도에는 상실한 땅을 가리키는 ‘실지(失地)’들이 표시돼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 또한 실지로 표기돼 있다.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선. 한국이라고도 함. 우리나라 번속이었는데 광서21년(1895) 시모노세키조약으로 그 독립이 허락됨.’ 청일전쟁 종전협정인 시모노세키조약 때까지 조선은 역대 중국 속국이었다는 말이다.
과연 1895년 6월 2일 조선 국왕 고종이 이렇게 조령을 내린다.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우리 독립을 세계에 표창했다. 영구 독립을 기리는 독립경축일(獨立慶日·독립경일)로 정해 큰 명절(大慶節·대경절)로 삼으라.”(1895년 음5월 10일 ‘고종실록’) 그런데 지도에 붙은 조선 설명은 이렇게 끝난다. ‘선통2년(1910) 일본에 멸망함.’ 속국을 독립시켜줬더니 일본에 망했다는 뜻이다. 독립 15년 만에.
수천 년 중국이 지휘하던 천하(天下)가 붕괴되고 근대 세계가 시작됐다. 어쩌면 조선 역사상 국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했다. 하지만 조선 지도부는 근대로 연착륙할 기회를 붙잡지 않았다. 청일전쟁 종전 후 1905년 을사조약까지 10년을 많은 사람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른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98.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⑦대한제국과 잃어버린 10년
조선을 외면한 열강들
1894년 8월 1일 일본이 중국에 공식 선전포고를 한 이후 열강은 일제히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은 선전포고 전 상선 고승호가 일본 포격에 침몰당했는데도 중립을 선언했다. 미국, 독일, 오스트리아에 이어 러시아 또한 각료회의에서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은 오히려 일본에 호의적이었다. 영국은 일본이 중앙아시아에서 영국과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이고 있던 러시아의 극동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 판단했다. 전황이 압도적인 일본 승리로 돌아갔어도 열강은 ‘이해관계 손상을 우려해’ 겉으로는 중립을 지켰다.(석화정, ‘청일전쟁 전황과 조선의 독립 문제에 대한 열강의 정책’, 군사 102집, 군사편찬연구소, 2017) 전쟁 동안 일본군에 의해 3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학살당했지만 열강은 침묵했다. 일본 종군기자들이 쏟아붓는 동학 진압 기사도 이들에게는 무의미했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둔 그들에게는 이익 극대화를 위한 공존 질서가 더 중요했다.(조경달, ‘이단의 민중반란’, 박맹수 역, 역사비평사, 2008, p329)
주영국 일본공사 아오키 슈조는 “유럽 제국은 일본 요구가 유럽 이익을 해치지 않고 중국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전혀 반대할 이유가 없다”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일본이 승리하면 대륙에서 일본이 큰 이권을 차지하고, 여타 열강 또한 ‘최혜국 대우’ 조항(한 국가에 부여하는 유리한 대우를 다른 조약 당사국에도 부여한다는 조항)에 따라 동일한 이득을 얻으려는 심산이었다.(陳偉芳, ‘청일 갑오전쟁과 조선’(1959), 권혁수 역, 백산자료원, 1999, p228)
그리고 그해 10월 26일 일본 내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전권공사로 입국했다. 단순한 공사가 아니었다. ‘전권(全權)’을 가진 거물 정치인이 직접 조선을 좌지우지하겠다는 뜻이다. 친일 혹은 최소 중립을 선언한 외세로부터 외면당한 조선은, 고립무원이었다.
고종의 독립 선언과 개혁 거부
1864년 1월 21일(음력 1863년 12월 13일)
26대 조선 국왕에 등극한 고종은
그해 10월 9일 청 황제로부터 국왕에 정식으로 책봉됐다.
‘승정원일기’는 이러하다. ‘특별히 황제 허락을 받아 고칙(誥勅·번국의 왕을 봉하는 황명)을 반포하게 되었나이다. 황은이 하늘같아(皇恩如天·황은여천) 보답할 방도를 모르겠나이다.’(1864년 음 9월 9일 ‘승정원일기’)
그리고 1894년 건국 이래 최대 민란, 동학농민전쟁이 터졌다.
죽창을 들었던 동학 농민군은 고종 정권이 부른 외국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조선에서 시작한 청일전쟁은 대륙에서 종료됐다. 그 부산물로, 열강의 외면 속에, 일본의 야심 가득한 조선 독립이 이뤄졌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청일 양국 간 맺은 조약 1조는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였다. 철저한 부산물이며 대륙을 노리는 일본이 조선을 자기네 섬돌로 삼겠다는 노골적인 선언이었다. 조약 체결 두 달 뒤 일본은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 3국의 간섭에 의해 전리품으로 넘겨받은 요동반도를 반환했지만, 이미 일본은 ‘이들 3국 연합은 화장 처리만을 남긴 시신 정도의 힘밖에 없는 존재’로 판단하고 있었다.(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 침략’, 지식산업사, 2007, p272)
그런데 ‘독립’을 한 것이다. “하늘같은 황은을 갚을 길이 없다”고 했던 그 지도자가 조약 체결 한 달 보름 뒤인 6월 2일 영원무궁한 독립을 경축하라고 명한 것이다. 어명 뒤에는 일본 후원을 받는 갑오개혁 정부가 있었다.
그런데 고종은 이 ‘독립 선언’ 후 23일이 지난 그달 25일 “작년 6월 이후 칙령과 재가 사항은 어느 것도 내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철회한다”라고 전격 선언했다.(‘일본외교문서’ 28권 1책, p444~445, 7.조선 국내정 개혁에 관한 건 301. 왕궁 호위병 교대에 관한 국왕과 내각 충돌보고 1895년 6월 26일) 어부지리로 얻은 혹은 강요된 독립은 받아들이고, ‘구시대 병을 고치려고 쓰는 약’(황현, ‘매천야록’ 2권 1894년 ② 7.일본군의 남산 포진과 오토리 게이스케의 알현)은 단칼에 거부해버린 것이다.
잃어버린 10년
당시 아시아에서 활동했던 영국 외교관 조지 커즌은 조선을 이렇게 보았다. ‘조선은 팔에 안겨 있는 아기 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유약함이 조선의 유일한 강점이다.’(조지 커즌, ‘Problems of the Far East’, Longmans, 런던, 1894, p231) 조선이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강력했더라면 틀림없이 열강에 먹혀버리고 말았으리라는 뜻이었다. 외세에 의존해 생존하던 조선 정부에 대한 조롱이기도 했다.
청일전쟁 종전 후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진공 상태였다. 청은 배상금 마련에 정신이 없었고 일본 또한 국내 정치로 시끄러웠다. 러시아는 만주 경략에 여념이 없었다. 1896년 6월 9일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상호 합의 하에 조선에 간여한다’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가 조인됐다. 최소한 외교적으로는 조선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세력 균형에 합의했다는 뜻이다. 그 상황에서 조선은 비교적 간섭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근대를 맞이할 수 있었고, 그러해야 했다.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굴복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하자 고종 정권은 러시아에 접근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정부가 개입해 왕비 민씨 암살 사건을 벌였고, 이에 고종은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이후 정국은 친러시아 집단이 이끌었다.
1896년 8월 10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 수리공사 개시를 명했다.(1896년 양력 8월 10일 ‘고종실록’) 이듬해 2월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그 사이 고종은 민영환을 보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시켰다. 그곳에서 민영환은 전권으로 ‘조선을 러시아 보호령으로 삼아달라’고 요구했고 훗날 무산됐지만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였다.(말로제모프, ‘러시아의 동아시아정책’, 석화정 역, 지식산업사, 2002, p136: 허동현, ‘대한제국의 모델로서의 러시아’,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연례학술대회, 2005, 재인용)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한 달 뒤 왕비 민씨를 위해 국고를 탕진하면서 성대한 국장을 치렀다.
1899년 고종 정권이 반포한 ‘대한국국제’에는 제정러시아 차르에 버금가는 황제 독재권이 규정됐다. 정치 고문, 군사 교관, 무기, 철도, 광산, 목재 같은 이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이권이 러시아로 넘어가는 광경을 본 다른 열강들도 ‘최혜국 대우’ 조항을 내세워 이권을 챙겨갔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어에 능했던 김홍륙이라는 역관이 한 동안 고종의 입과 귀 행세를 하며 권력을 누렸다.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점령하자는 말이 나오자 고종은 반대를 물리치고 평양에 풍경궁이라는 대규모 궁궐 공사를 강행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전까지 대한제국 정부 치하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미 명백하게 밝혀져 있다. 수동적으로 개시된 개혁을 거부하고 권력을 극소수 집단에 집중시킨 결과, 조선과 그 후속 국가인 대한제국은 ‘황제 또는 황제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소수의 관료가 동의하면 그만인 허약한 주권을 가진 나라로 전락했다(김윤희, ‘제국민(帝國民), 대한제국, 대한제국 황제’, 내일을 여는 역사 17,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2004)’. 총 한 방 쏘지 않고 도장 하나로 나라가 넘어가버린 근본 원인이다.
잃어버린 그 10년에 대해 유사한 많은 평가가 존재한다. 하나를 인용한다. ‘1896년부터 1905년까지 10년을 성실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이용했었더라면 한국의 미래는 바뀌었을 것이고 극동의 역사와 세계 역사도 아마 상당히 바뀌었을 것이다.’(이정식, ‘한국민족주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1963·캘리포니아대 출판부), 한밭출판사, 1983, p83~85) 1963년 이정식 교수(작고)가 쓴 이 책 영문 원본에는 ‘성실히 이용했다면’이라는 문구가 ‘conscientious use’라고 적혀 있다. 첫 번째 사전적 의미는 ‘양심적인’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