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 4㎞, 미국의 가치가 새겨진 것처럼
서울 광화문 자유 이승만광장. 프리덤 트레일(자유의 발걸음) 4km을 만들자
4.15부정선거를 넘어 ~
자유를 향한 투쟁의 발걸음, "광화문 프리덤 트레일"을 제안합니다
매일 오후 2시부터 저녁 6시까지(토요일에 집중)~
자유의 물결은
검은우산을 쓰고,
작은 가방에 물병과 간식을 넣고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화살표 방향으로 돌면 4Km정도 된다
한바퀴를 돌면 30분정도.
가다가 힘들면 쉬면서 2바퀴정도만 걸으면 어떨까
백명, 천명, 만명, 10만명이 동참한다면 그광경은 대단 할 것이다
이것은 집회가 아니다.
그냥 자유롭게
자유를 향한 투쟁의 걸음일뿐~
(출발점)광화문역-->세종문화회관-->광화문앞 횡단보도--->
미국대사관--> 교보빌딩-->동아일보-->프레스센터--> 시청앞 광장 횡단보도--->
덕수궁 대한문-->서울시의원회관-->코리아나호텔(조선일보)-->광화문역(출발점)
(1.2km. ~ 왕복2.4km)
방향은 한 방향으로,
같은 방향으로 돌아야됩니다.(지도에서 제시한대로)
4.15부정선거 무효투쟁
검은 우산을 쓰고 광화문 이승만광장 거리를 걸어요
광화문에서 시청까지 시계방향으로 1.2Km~(왕복 2.4km)
4.15부정선거를 넘어 ~
자유를 향한 투쟁의 발걸음, 프리덤 트레일을 제안합니다
보스턴 시내를 다니다 보면
독립혁명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지를 이은 프리덤 트레일 표지판
-----------------------
조선일보 보스턴=송동훈 문명 탐험가 입력 2020.06.24 05:00 |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54]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 4㎞, 미국의 가치가 새겨져 있다
프리덤 트레일과 새뮤얼 애덤스
미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다. 'United States of America'란 표현에서 드러나듯 50주(州·State)가 연합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다. 국가의 근간이 되는 '주'가 처음부터 50주였던 것도 아니다.
처음 독립을 선언할 때 주의 수는 동부 해안가를 따라 들어선 13주에 불과했다.
그들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 남부의 버지니아, 중부의 펜실베이니아와 뉴욕, 북부의 매사추세츠가 가장 크고 강력한 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매사추세츠주는 흔히 뉴잉글랜드라 부르는 북부 지역의 중심이었다.
보스턴은 그런 뉴잉글랜드의 심장이었다. 1630년 청교도들이 건설한 보스턴은 자유와 자치를 소중히 여기는 상공업자, 자영농민, 어부, 선원들의 도시였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스턴은 18세기 후반에 미국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했다. 19세기에는 열렬한 노예제도 폐지 운동의 중심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가장 미국적인 가치의 수호자임을 자부하고 있다. 보스턴은 그런 자부심을 기억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기여를 잊지 않기 위해 독립혁명으로 이르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을 연결해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자유의 여정을 뜻하는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이다.
A. 자유를 향한 투쟁의 길, 프리덤 트레일
보스턴 시내를 다니다 보면 독립혁명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지를 이은 프리덤 트레일 표지판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프리덤 트레일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정원인 보스턴 코먼(Boston Common)에서 시작해 찰스타운에 있는 벙커 힐(Bunker Hill)까지 이어진다.
미국 독립혁명과 관련된 주요 장소들을 거치는데 총길이는 4㎞ 정도다.
화창한 봄날이나 선선한 가을날이라면 산책 삼아 걷기에 적당한 거리다.
길을 따라 자유를 향한 투쟁의 기록이,
자유를 최우선으로 삼는 미국적 가치가 새겨져 있으니 역사 공부에도 안성맞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생기 넘치며, 멋진 곳을 꼽으라면 패뉼 홀(Faneuil Hall)이다. 이곳은 옛 보스턴의 대표적인 공공건물로, 아직 시장으로 쓰이고 있다. 독립혁명 전후에 보스턴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서 현안을 논의하고, 토론을 벌이고, 행동을 결의했다. 이곳을 '자유의 요람(Cradle of Liberty)'이라 일컫는 이유다. 그런 패뉼 홀 앞 광장을 단 하나의 동상이 장식하고 있다.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1722~1803). 그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동상을 남기는 영예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B. 자유를 위해 대영제국에 맞서다
새뮤얼 애덤스는 1722년 보스턴의 유복한 양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버드를 졸업한 뒤 기업과 정부에서 여러 일을 했으나 빛을 발하지는 못했다. 그의 재능과 열정에 꼭 맞는 분야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정치였다. 애덤스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는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시민들에게 애정을 느꼈고, 그들이야말로 미국이란 사회의 근간이고 미래라고 봤다.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았던
애덤스의 정치철학은 단순했다.
그는 세상을 자유와 압제가 투쟁하는 장(場)으로 봤고,
자유를 획득하고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만이 진정 가치 있는 행위라고 봤다.
그의 이러한 정치철학은 하버드 대학 졸업논문에서도 나타난다. '만약 그 외의 수단으로 국가를 보전할 길이 없다면 국왕에게 반항하는 행동은 합법적인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에서, 애덤스는 '그렇다'고 결론 내렸다. 1700년대 중반에 새뮤얼 애덤스의 주장은 국왕 입장에서는 반역이었다.
인디언 복장을 한 수십 명의 보스턴 시민이 항구에 정박한 동인도회사 소속 배에 올라 실려 있던 차(茶)들을 바다에 내던지고, 구경 나온 시민들은 이에 환호하고 있다. 새뮤얼 애덤스가 주도한 보스턴 티파티(1773년 12월 16일)로 인해 영국과 식민지 간 충돌이 불가피해졌고, 결국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이런 애덤스에게 7년 전쟁-북미 대륙의 패권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전쟁(1756~1763년)-이후 식민지에서 전개되는 상황은 심각했다. 프랑스를 몰아내고 북미 대륙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된 영국은 식민지를 상대로 함부로 세금을 거두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자유를 억압했다. '모국(母國)'이라 여겼던 영국이 식민지의 자유와 번영을 억압하는 전제자로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애덤스는 점차 영국에서 독립하지 못하면 식민지는 영원히 자유롭지도 번영하지도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1765년부터 그는 저항운동을 조직했고,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열정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애덤스가 가장 애용한 곳이 바로 패뉼 홀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고,
협의하고,
결정하는 타운미팅에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가 존재한다고 느꼈다.
일반 시민에 대한 애덤스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져갔다.
그러나 애덤스의 연설과 글만으로 식민지인의 불만과 좌절, 불안과 분노를 행동으로 승화시킬 수는 없었다.
뭔가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했다.
C.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해서 투쟁하다
애덤스가 애타게 기다리던 계기는 1773년 봄에 찾아왔다. 영국 정부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동인도회사를 지원하기 위해 이 회사가 식민지 시장에서 중개인을 배제하고 소비자들에게 직접 차(茶)를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 것이다. 차 가격은 떨어지겠지만 식민지 중간상인들은 파산할 것이 뻔했다. 상인들은 물론이고 소비자들도 격분했다. 차 시장을 독점하려는 시도를 식민지 시장 전체를 장악하고 착취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봤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의 차에 대한 분노는 '보스턴 티 파티(Tea Party)' 사태로 타올랐다.
애덤스가 이끄는 일군의 시민들이 차를 가득 싣고 보스턴에 입항한 배들에 난입해 배에 실려 있던 차를 몽땅 바다에 던져버린 것이다(1773년 12월).
‘자유의 요람’이라 일컫는 보스턴의 패뉼 홀 앞에는 미국의 독립과 혁명을 이끌었던 새뮤얼 애덤스의 당당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보스턴 티 파티에 대한 영국 정부의 반응은 강경했다. 영국 왕 조지 3세는 "승리 아니면 굴복만이 있을 뿐"이라며 식민지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영국 의회는 보스턴 항구 봉쇄, 자치의 금지, 군대의 주둔, 사법관할법의 제한 등 소위 '참을 수 없는 법'이라 불리게 될 법들을 통과시켰다. 애덤스가 주장해왔던 영국의 전제정치가 드디어 마각을 드러낸 것이다. 뒤늦게나마 식민지인들은 대영제국 정부의 본질을 알아챘다.
애덤스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륙 회의에 매사추세츠주 대표로 참석해
오랜 세월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열세 식민지가 함께 행동하기로 결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 독립혁명은 그렇게 보스턴에서, 새뮤얼 애덤스에 의해 시작됐다. 전쟁이 끝난 후 애덤스는 주지사로, 부지사로, 주상원 의장으로 매사추세츠주를 이끌었다.
D.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다
새뮤얼 애덤스는 누구보다 미국의 독립혁명에 헌신했던 지사(志士)였다. 그에게 정치는 일상이었고, 독립은 목표였으며, 자유는 모든 것이었다. 그의 동상이 서 있는 패뉼 홀은 퀸시 마켓(Quincy Market)과 이어져 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시민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감상하고, 무리를 지어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한다.
보스턴에서 가장 자유롭고 활기찬 곳이다.
이 도시의 자유와 번영은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전제정치에 맞서 싸워 획득한 것이다.
그 투쟁의 선두에 언제나 새뮤얼 애덤스가 있었다.
패뉼 홀 앞 광장에 놓은 그의 동상을 떠받치고 있는 기단의 문장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기단 정면에는 '애국자, 그는 혁명을 조직했고,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다'고 새겨져 있다. 양 측면에는 정치가로서는 청렴하며 두려움 없었다고, 주지사로서는 민중의 참된 리더였다고 적혀 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진정한 애국자인 동시에
탁월한 정치가이며,
참된 리더일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곳은 언제나 낯설고,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곳이다.
[대통령 4명 배출한 매사추세츠, 州 대표로 새뮤얼 애덤스 선정]
최근 미국에서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사망한 이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미 연방 하원의장이 워싱턴DC 의사당의 '연방 조각상들의 전당'에서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지지했던 남부연합 지도자 11명의 동상을 철거할 것을 요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연방 조각상들의 전당'이란 이름으로 의사당 곳곳에 전시된 동상들은 각 주(州)가 대표 시민 2명씩을 선정해서 의회에 보낸 것이다. 매사추세츠주가 보낸 동상의 주인공은 혁명의 아버지인 새뮤얼 애덤스와 초창기 매사추세츠를 이끌었던 청교도 지도자 존 윈스럽이다. 매사추세츠는 케네디를 비롯해 대통령만 4명을 배출한 주임에도 새뮤얼 애덤스를 대표 시민으로 선정했다. 그만큼 그의 위상이 대단한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4/2020062400076.html
'3. 생각하는 여유 > korea vision21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은산 상소문.~ 시무7조, 간신이 쥐떼처럼 창궐하여 역병과도 같으니~청와대 국민청원~415부정선거 (0) | 2020.09.07 |
---|---|
토머스 제퍼슨의 맹세~인간의 정신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를 영원히 용서치 않겠노라 맹세했다~.神의 제단 앞에서 (0) | 2020.09.04 |
MBC방송.비례32번 새벽당 전략위원장 김정민 시작과 끝? Korea.No.1 김정민박사 2020년4월7일 (0) | 2020.04.09 |
자유통일당 홈페이지~~자유통일당 찾아가는길..지도. 주소. 전화 ~자유통일당 김문수대표 인사말~ (0) | 2020.02.17 |
정홍원 前총리 "문재인 정부는 총체적 거짓-파탄-失政...문대통령 자진사퇴하라" 공개질의[전문과 동영상] (0) | 2020.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