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56]
한손엔 쟁기,
한손엔 총… 세계 최강 정규군을 농민들이 꺾었다
조선일보 렉싱턴·콩코드=송동훈 문명탐험가 입력 2020.07.21 05:00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1/2020072100032.html
렉싱턴·콩코드와 민병의 나라
미국 보스턴 북서쪽 콩코드 올드 노스 다리 부근에 세워진 민병대원의 동상.
한 손에는 총을,
다른 손에는 쟁기를 움켜쥐고 있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하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싸우고,
위기가 지나가면 생업으로 돌아간다는 민병 정신을 상징한다.
이들이야말로 미국 독립 전쟁의 진정한 주역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선거조작 4.15부정선거 무효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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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누군가 총을 쏘았다. 영국군인지 아메리카 식민지 민병대인지는 불분명했다. 총이 발사됐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한 영국군 장교가 발사 명령을 내렸고, 영국군은 민병대를 향해 일제 사격을 했다.
매사추세츠주 렉싱턴의 공유지에서 벌어진 첫 충돌은 순식간에 끝났다. 민병대원 8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영국군 피해는 사병 1명이 찰과상을 입은 데 불과했다. 영국군의 승리였다.
A. 전 세계에 울려 퍼진 총성
여세를 몰아 영국군은 콩코드를 향해 나아갔다. 새뮤얼 애덤스와 존 행콕을 비롯한 반란군 지도자들이 도망친 곳, 민병대의 주요 무기고가 있는 곳이었다. 당초 계획대로 콩코드를 장악하고 반란군 지도자들을 체포한다면, 보스턴과 매사추세츠의 저항은 종식될 터였다. 그러나 콩코드 상황은 렉싱턴과는 달랐다. 소집 명령이 떨어지면 1분 안에 출동한다고 해서 '미니트맨(Minute Men)'이라고 하는 긴급 소집병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인근 마을에서도 민병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두 번째 충돌은 콩코드의 올드 노스 브리지(Old North Bridge)에서 벌어졌다. 민병대원들은 다리 주변에 흩어져 효과적으로 영국군을 공격했다. 민병대원들이 감히 대항해올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던 영국군은 충격을 받았고,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혼비백산해 퇴각했다. 민병대는 나무, 바위, 건물 뒤에 숨어 보스턴을 향해 후퇴하는 영국군을 저격했다. 영국군이 궤멸되지 않은 건 렉싱턴에서 증원군 1000명을 만난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민병대도 계속 수가 늘었다. 양측의 전투는 사격전에 이어 치열한 백병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영국군은 사상자 273명을 낸 채 후퇴했다. 민병대의 피해는 95명에 그쳤다. 독립을 향한 첫 전투의 승리는 식민지 민병대에 돌아갔다. 1775년 4월 19일이었다.
B. 민병의 고향, 렉싱턴과 콩코드
미국 독립 전쟁의 첫 전투가 벌어진 렉싱턴(Lexington)과 콩코드(Concord)로 가는 길은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울창한 숲과 풍요로운 농경지가 연이어 나타난다. 작은 강과 연못, 저수지를 흔히 볼 수 있다. 그 풍경 사이로 목가적인 작은 마을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전형적 뉴잉글랜드의 멋진 풍광이다. 렉싱턴과 콩코드는 그런 소읍(小邑)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특히 콩코드는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1803~1882)과 헨리 D. 소로(Henry David Thoreau·1817~1862)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렉싱턴·콩코드에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건 미국 독립 전쟁의 첫 번째 전투 무대였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아메리카 식민지가 거둔 승리를 동시대인들은 기적처럼 여겼다. 제대로 된 군사훈련조차 받아본 적 없는 민병들이, 세계 최강의 대영제국 정규군과 싸워 이기리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 두 소읍의 전투 현장에는 승리의 주역이었던 민병(民兵) 동상이 서 있다. 모두 평범한 농부 차림이다. 군인이 아니니 당연하다. 그렇다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독립 전쟁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미국의 진짜 건국자들이었다.
C. 대륙군의 주축이 되다
'보스턴 차 사건(1773월 12월)'이후 아메리카 식민지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영국 의회는 식민지인들이 '참을 수 없는 법(Intolerable Acts)'을 제정해 보스턴에 보복했다(1774년).
식민지인들은 영국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1차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개최했다(1774년 9월). 대륙회의는 여러 가지를 결의했는데 그중에는 영국군의 공격에 대비한 군사적 조치도 포함됐다. 핵심은 각 주(州)에 민병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무도한 통치에 치열하게 저항 중이던 매사추세츠가 민병대 창설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버지니아에서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1732~1799)을 중심으로 한 명사들이 민병대를 조직했다. 이때 구성된 민병대가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톡톡히 역할을 해낸 것이다. 식민지는 첫 승리에 고무됐다. 전쟁의 열기가 전역으로 번져 모든 식민지에서 민병대가 자발적으로 조직됐다. 사태는 돌이킬 수 없어 보였다. 결국 대륙회의는 효과적 투쟁을 위해 군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1775년 6월 14일). 그다음 날인 6월 15일, 대륙회의는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임했다. 민병대는 이때 창설된 대륙군의 주축이 됐다.
D. 민병이 세운 나라, 미국
전장의 주력은 대륙군으로 넘어갔지만 민병대의 역할은 줄지 않았다.
정규군으로 변모한 민병들은 워싱턴 휘하에서 혹독한 경험과 체계적 훈련을 받으면서 좀 더 군인다워졌다. 그러나 대륙군만으로 영국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병으로 남은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고향과 가족을 지켰다. 동시에 대륙군의 보조 역할을 해냈다. 북부 뉴잉글랜드에서 시작된 독립 전쟁의 전선(戰線)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부 뉴욕·펜실베이니아를 거쳐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조지아로 옮아갔다.
남부에서는 민병들의 활약이 더욱 돋보였다. 규율과 훈련이 부족했던 탓에 전면전에서는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독립의 대의를 위한 열정과 용기만큼은 충분했다. 민병들은 프랜시스 매리언(Francis Marion), 토머스 섬터(Thomas Sumter)와 같은 탁월한 지휘관 밑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특히 매리언은 '늪의 여우(The Swamp Fox)'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험한 지형을 교묘하게 활용해 영국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이들의 활약은 멜 깁슨 주연 영화 '패트리어트-늪 속의 여우(The Patriot·2000년)'에 잘 묘사돼 있다.
영화 '패트리어트-늪 속의 여우(The Patriot·2000년)'의 한 장면.
주인공인 민병대 대장 벤저민 마틴(멜 깁슨)이 영국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영화는 미국 독립 전쟁 기간 게릴라전을 펼쳤던 민병들의 활약상을 소재로 하고 있다. /Photo12.com - Collection Cinema/AFP
치열했던 미국 독립 전쟁은 1783년 9월 파리에서 열린 강화조약으로 막을 내렸다.
식민지 아메리카인들이 대영제국을 상대로 승리했다.
대륙군은 해체됐고 군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민병들은 총을 내려놓고, 각자 일상으로 돌아갔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민병과 민병이 주축을 이룬 대륙군이 탄생시켰다. 어떤 이름으로 불렸든, 어떤 곳에서 싸웠든 그들 모두는 자신의 고향과 가족, 자유와 자치를 지키겠다며 분연히 떨쳐 일어난 아메리카의 생활인들이었고, 자유인들이었다.
그 사실을 웅변하듯이 콩코드 올드 노스 브리지에 있는 동상의 민병대원은
오른손에는 총을 들고,
왼손으로는 커다란 쟁기를 잡고 있다.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나가 싸우고,
위기가 지나가면 물러나 생업에 종사한다는 민병 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독립 전쟁 때 총을 들었던 수많은 민병 중 많은 이가 다시 쟁기를 잡지 못했다.
에머슨이 '콩코드 찬가(Concord Hymn)'에서 노래했듯,
그들은 후손에게 자유를 선물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것을 증명했다.
누구라도 이 자명한 이치를 잊는다면, 자유도 잃게 될 것이다.
E. ["州의 안보를 위해 개인의 무기 소지 권리 침해할 수 없다"]
'규율 있는 민병들은 자유로운 주(州)의 안보에 필요하므로, 무기 소지 및 휴대에 관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수정 헌법 2조
미국에서는 독특하게 총기 소지 및 휴대가 권리장전이라고 하는 수정 헌법에 명시돼 있다.
민병이 독립 전쟁의 주체였다는 사실과 영국 식민지 시대에 생겨난 뿌리 깊은 상비군에 대한 불신 때문에 생겨난 조항이다. 점차 독립 전쟁 당시의 민병 제도는 사라졌지만, 많은 미국인은 19세기 내내 서부 개척지에서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오랜 세월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해왔다. 그 결과, 총기 소지와 휴대는 개인의 권리이자 스스로를 보호한다는 자기 방어 수단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높은 범죄율과 총기에 의한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최소한 총기 소유 자격과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무기 종류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바라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1/20200721000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