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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훈~뉴욕과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1755?~1804년)은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중앙은행 설립한 美 초대 재무

언제나오복의향기 2020. 11. 18. 13:02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64] 중앙은행 설립한 美 초대 재무, 뉴욕의 마천루 200년간 지키다

뉴욕과 알렉산더 해밀턴

송동훈 문명 탐험가

 조선일보  입력 2020.11.10 03:00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금강경.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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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도시 문명의 상징이자 세계 제국 미국의 경제 금융 중심지인 뉴욕의 마천루가 알렉산더 해밀턴 흉상 뒤로 펼쳐져 있다. 해밀턴은 미국의 미래를 내다보고 거기에 적합한 국가의 제도적 틀을 쌓은 선구자였다. 흉상이 놓인 뉴저지주 위호켄에서 해밀턴은 정적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사진=송주영

 

뉴욕(New York)은 상징이다. 바벨탑처럼 하늘을 향해 뻗은 수많은 고층 빌딩은 도시를 상징한다. 자유의여신상은 말 그대로 ‘자유(Liberty)’를 상징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은 공존을 상징한다. 눈부신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브로드웨이의 밤은 화려하고 감각적인 문화를 상징한다. 부정적 상징도 있다. 한때 세계화를 상징했던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9‧11 메모리얼은 흔들리는 세계화와 격화되는 문명의 충돌을 상징한다. 더러운 뒷골목과 할렘은 가난과 범죄, 차별의 상징이다. 그렇게 뉴욕은 인류의 명암을 상징하는 현재의 축소판이다.

 

현대 문명의 상징 뉴욕

뉴욕을 감상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시 한가운데로 들어가 느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시에서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두 방법이 다 필요하다. 그중 뉴욕을 전체적으로 감상하기에 가장 의미 있는 곳은 뉴저지주 위호켄(Weehawken)의 해밀턴 공원이다.

뉴저지주 쪽에서 바라본 뉴욕 맨해튼섬의 장려한 마천루. 인간이 건설한 가장 장엄한 도시 뉴욕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게티이미지뱅크

 

위호켄의 해밀턴 공원은 맨해튼섬 맞은편에 있다. 허드슨강과 뉴욕이 바라보이는 높은 언덕에 있어 전망이 기막히다. 특히 맨해튼섬을 따라 길게 늘어선 마천루의 위용이 압권이다. 뉴욕이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다. 시대 흐름을 잘 탔고, 수많은 사람이 피땀을 흘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뉴욕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을 한 명 꼽으라면 그는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오늘날의 미국을 상상한 몽상가이자, 오늘날의 미국을 설계한 전략가다.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1755?~1804년)은 영국령 서인도 제도의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연도는 불확실하다. 어려서 고아가 됐지만 총명하게 타고났다. 성공 의지도 강했다. 해밀턴은 결국 노력 끝에 뉴욕으로 터전을 옮겼고, 컬럼비아 대학교의 전신(前身) 킹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당시는 혁명 시대였다. 많은 미국인이 억압받는 식민지인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대영제국과 싸우기를 열망했다. 해밀턴 역시 아메리카인의 권리를 믿었고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독립 전쟁이 터지자 해밀턴은 입대했다. 그의 탁월한 재능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부관으로 임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워싱턴과 해밀턴은 사선을 함께 넘으며 부자(父子)처럼 서로를 신뢰하게 됐다. 이때 형성된 두 사람 관계는 다가올 미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쟁은 식민지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풀어야 할 난제가 가득했다. 헌법 제정과 정부 구성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했다. 강력한 중앙정부가 영국 정부를 대신해 독재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식민지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 필요성이 앞섰다. 1787년 5월 독립의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헌법 제정 회의가 열렸다.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을 필두로 한 미국의 ‘대인물’ 55명이 모였다. 외교관으로 해외에 나가 있던 존 애덤스(영국 대사, 2대 대통령)와 토머스 제퍼슨(프랑스 대사, 3대 대통령)을 제외한 당대 최고 명사들이었다. 해밀턴은 뉴욕주(州)를 대표해서 회의에 참석했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다

 

해밀턴의 정치 철학은 그의 삶과 유리돼 있었다. 출생은 비천했으나, 해밀턴은 영국의 귀족정치와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민중의 상식, 대중의 분별, 여론의 선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밀턴은 미국에서 입헌군주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공화정부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해밀턴은 차선책으로 견제와 균형을 토대로 하되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했다.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국부(國父) 다수도 해밀턴의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미국 헌법이 탄생할 수 있었다. 모두의 지지와 환호 속에서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헌법은 문서에 불과하다. 문서에 새겨진 정신과 제도를 구현하는 것은 사람 몫이다. 워싱턴은 새로 출범한 정부의 가장 중요한 직책인 재무장관에 해밀턴을 임명했다. 또 다른 핵심 직책인 국무장관은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해밀턴과 제퍼슨은 미국 초대 내각의 양대 축이었다. 동시에 서로 상반된 정치 철학과 국가 전략의 대표 주자였다. 해밀턴은 ‘연방주의자’였다. 무질서를 혐오했고 효율과 질서를 중시했다. 새로 탄생한 미국의 미래가 상공업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융과 사적 거래에 신용을 제공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를 선호했다. 제퍼슨은 ‘반(反)연방주의자’였다. 독재를 미워하고 자유를 중시했던 제퍼슨은 연방보다 주의 권리를 우선시했다. 민중을 신뢰했고 여론을 중시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영농들이 이끄는 농업 국가를 미국의 미래로 봤다. 둘은 개인적 성향, 정치적 철학, 정책 방향, 국가의 이상향 등 모든 점에서 대척점에 서 있었다.

 

해밀턴은 재무장관 지위를 이용해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고, 상공업을 진흥할 금융 시스템을 정착시켰다. 우선 헌법 제정 이전의 정부가 독립 전쟁 과정에서 진 채무 변제를 추진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계약을 존중해야만 단기간에 미국 정부에 신용이 생긴다고 본 것이다. 당시 채무 대부분은 독립 전쟁 동안 대륙회의가 군인들에게 발행해준 봉급 지불 증서였다. 대륙회의에 대한 불신과 생활고로 많은 군인은 봉급 지불 증서를 헐값에 시장에 내다 팔았고, 투기꾼들이 사들였다. 해밀턴의 계획대로 중앙정부가 채무를 이행하면 큰 이득을 보는 것은 투기꾼들이었다. 반대가 심했지만 해밀턴은 채무 이행을 강행했다. 사적(私的) 거래를 존중하고 정부의 신용을 쌓는다는 더 큰 목표를 위해서였다. 연방정부가 각 주의 부채를 인수하는 계획도 추진했다. 역시 반대가 심했다. 부채가 적은 주가 많은 주를 위해 세금을 더 내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밀턴은 제퍼슨 등과 미국의 수도를 버지니아에 설치하기로 타협함으로써 ‘부채 인수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적의 총에 최후를 맞다

해밀턴의 또 다른 업적은 중앙은행 설립이다. 그는 중앙은행의 후원을 받아야 상공업이 번창하고, 상공업이 번창해야 연방정부가 강력해질 것이라고 봤다. 문제는 헌법에 명기된 연방정부의 권한 중에 은행 설립 조항이 없다는 것이었다. 반(反)연방주의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해밀턴은 헌법을 유연하게 해석하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해밀턴의 손을 들어줬다. 그렇게 미국에 중앙은행이 탄생하고 상공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이 갖춰지기 시작했다(1791년). 모두 해밀턴의 공적이다.

해밀턴의 영도와 워싱턴의 지지에 힘입어 연방주의자들은 새롭게 태어난 미국의 기초를 쌓고 정부의 틀을 짰다. 부유하고 계몽된 지배계급, 활력 있는 상업 경제, 다양한 제조업이 번영하는 국가 비전을 제시했다. 해밀턴은 위대한 선구자였지만 대중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는 대중을 신뢰하지 않았다. 대중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해밀턴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해밀턴에게는 정적(政敵)이 많았다. 뉴욕의 거물 정치인 에런 버(Aaron Burr·1756~1836)와 특히 심각한 관계였다. 재능과 그릇에 비해 터무니없는 큰 꿈을 품었던 버는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패배했다. 해밀턴이 제퍼슨을 지지한 탓이다. 버는 이때부터 해밀턴을 증오했다. 그 후 버는 제퍼슨 정부에 반대해 연방 탈퇴를 획책하던 세력과 손잡고 뉴욕주지사에 도전했다. 해밀턴은 공개적으로 버의 행동을 비난했다. 선거에서 패한 버는 이 역시 해밀턴 탓이라며 결투를 신청했다. 겁쟁이란 소리를 듣는 것이 싫었던 해밀턴은 응했다. 두 사람은 결투가 불법이 아니었던 뉴저지의 한적한 숲에서 권총을 들고 만났다. 그 자리에서 해밀턴은 버의 총을 맞고 죽었다(1804년 7월 12일).

위호켄의 해밀턴 공원은 바로 버에게 해밀턴이 살해당한 곳이다. 뉴욕의 마천루가 보이는 곳에는 해밀턴 흉상이 놓여있고,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다. 합당하다. 해밀턴이 없었다면 오늘의 뉴욕도 미국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의 미국을 꿈꾸고 설계한 선구자다. 비록 대중과 시대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랑의 단물만 뽑아 먹고 헛되이 떠난 그 어떤 인물보다 심오한 유산을 남겼다. 위호켄의 해밀턴 공원은 그런 해밀턴의 비극적 최후를 추모하고, 그가 남긴 유산을 감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해밀턴 부인의 말은 200년 후 뮤지컬로 실현됐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명성과 업적을 되살려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의 한 장면. 독립 전쟁에서 결투로 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려냈다.

 

해밀턴만큼 업적에 비해 혐오를 많이 받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물다. 정적(政敵) 제퍼슨이 강조했던 민주주의가 해밀턴이 중시했던 귀족주의보다 미국인의 기질에 더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밀턴은 미국 헌법에 내포된 이상을 제도로 현실화한 설계자였다. 미국의 미래에 대해 누구보다 명확한 비전을 제시한 선구자였다. 그의 삶은 최근 론 처노(Ron Chernow)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린-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의 뮤지컬 ‘해밀턴(Hamilton)’이 브로드웨이를 석권함에 따라 재조명받고 있다. 해밀턴의 부인 엘리자베스가 자녀들에게 ‘나의 해밀턴, 그를 기억하는 일에도 정의가 찾아오리라’라고 했던 예언은 200년이 흐른 뒤 문화의 힘으로 실현됐다.

#송동훈의 세계문명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