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21] 교황 가두고 무슬림 혼내고… 노르만 용병, 시칠리아를 가로채다
조선일보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0.08.11 03:12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11/2020081100081.html
1. 노르망디인이 세운 시칠리아 왕국
11세기 초 노르망디의 작은 영지 오트빌 영주 탕크레드의 가상 초상화.
그 자제들의 모험은 시칠리아 왕국 건설로 정점에 이르렀다. /위키피디아
11세기 초, 노르망디 코탕탱 반도에 위치한 작은 영지 오트빌(Hauteville).
이곳 영주 탕크레드(Tancrède)는 두 번 결혼해서 15명의 아이를 얻었는데, 그중 12명이 아들이었다. 아들 부자라 든든하긴 했겠으나 많은 자식 장래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탕크레드가 죽었을 때 세를롱(Serlon)이라는 아들이 영지를 물려받았지만, 나머지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들이 찾은 답은 이탈리아 남부였다.
2. 용병으로 변신한 노르망디 출신 기사들
이 시기 이탈리아 남부 지방은 분열이 극심하여 영주 간 전투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었다. 게다가 아프리카 북부 지방에 자리 잡은 무슬림 세력의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보기 일쑤였다. 이곳 지배자들이 강력한 용병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노르망디 출신 기사들이 용병으로 많이 고용되었다. 하필 노르망디 사람들이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예컨대 '살레르노 전승'은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999년,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던 노르망디 기사들이 귀국길에 살레르노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아랍 세력이 공격해 와서 성을 포위하고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살레르노 공작이 싸울 생각도 안 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 노르망디인들은 이들을 겁쟁이라고 비웃더니 아랍인들에게 반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살레르노 공작이 이들에게 남아달라고 요청하자, 자신들은 돌아가야 하지만 고향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훌륭한 기사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탕크레드의 아들 12명 중 8명이 이탈리아로 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형제들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비잔틴 제국이 시칠리아를 공격한 1037년 전투다.
시칠리아 회복에는 실패했으나 이때 기욤 탕크레드는 '무쇠팔(Bras-de-f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무슬림 전사 한 명을 한 번에 창으로 꿰뚫는 괴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043년에 가면 이 형제들은 반란을 일으킨 푸이아 편으로 넘어가 비잔틴인들과 싸웠다.
용병이란 돈을 대는 편에 서서 싸우는 존재이므로 오늘의 적이 내일의 주인으로 바뀌는 것은 다반사라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당시 노르만 용병들은 돈에 대한 과도한 욕심으로 악명 높았다.
'무쇠팔' 기욤이 1046년 사망하자 그의 동생 드로고(Drogo, 혹은 Dreux)가 사업을 이어받았고,
1051년 드로고가 암살되자
다시 그 동생들인 험프리와 옹프루아가 승계했다.
드로고의 암살은 자세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지역 내 복잡한 정치 갈등의 결과인 건 분명하다.
탕크레드 형제들은 드로고를 죽인 암살자 일당을 잡아 악랄한 고문을 가하고 처형했다.
3. 교황을 포로로 잡은 바이킹 후예들
칼부림 잘하는 외지인들이 점차 세를 넓혀가자 현지인들이 점차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교황청은 이탈리아의 정치 균형이 깨지고, 무엇보다 교황령 바로 남쪽에 강력한 국가가 들어서려는 것을 용인하려 하지 않았다.
1053년 교황 레오 9세는 친분이 있던 비잔틴제국 황제와 독일 제국 황제 등이 제공한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노르망디 용병들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여했다.
그런데 노르망디 전사들이 푸이아의 치비타테(Civitate)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교황을 포로로 잡는 사태가 벌어졌다. 탕크레드의 아들 중 특히 로베르 기스카르(Guiscard, '교활한 자')가 이 전투에서 맹활약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아랍의 침공에 시달렸던 시칠리아의 복구 전투(1091년)에서 노르망디인 로제가 승리한 이후, 그의 아들 로제 2세가 1130년 대관식을 치르며 ‘이탈리아의 노르만 정복’을 완성했다.
로제 2세(재위 1130~1154년)의 시칠리아 왕국에
기독교인, 아랍인, 그리스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문화가 융합했던 내용이 담긴 파울로 주디치의 ‘이탈리아 역사’(1930) 중 삽화. /Alamy
이제 이탈리아 지배자들로서는 노르망디인들을 축출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니 차라리 이 강력한 전사 집단과 손잡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1059년에 기스카르는 칼라브리아 지방을 정복하고 교황의 허락 아래 푸이아·칼라브리아 공작이 되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고향에 남아 있던 동생들을 마저 불러왔는데, 그중 가장 탁월한 공적을 세운 인물은 막내인 로제(Roger)다. 그는 아랍인들에게서 시칠리아를 되찾는 위업을 이루었다.
4. 노르망디 용병, 시칠리아를 차지하다
원래 비잔틴 제국 영토였던 시칠리아는
9~10세기 동안 아랍인들의 침공에 시달리다가 965년에는 섬 전체를 내주게 되었다.
11세기에 들어서 비잔틴 제국은 시칠리아 복구 전투를 벌였다. 이때 비잔틴 제국 호위대로 활동하는 스웨덴계 바이킹 용사들과 노르망디 용병들이 함께 싸웠다. 스칸디나비아의 한 조상에서 가지를 친 두 바이킹 후예들이 먼 이역 땅에서 만나 함께 전투를 벌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공격을 주도한 비잔틴 장군 마니아키스(George Maniakes)는 시칠리아 회복을 완수하지 못한 채 비잔틴 제국 내의 내전에 휘말려 살해되었다. 이제 그 과업은 노르망디인들에게 맡겨졌다.
이들은 1091년 아랍의 마지막 거점인 노토(Noto)를 정복하고 시칠리아를 차지했고, 로제는 시칠리아 대공이 되었다.
시칠리아 주도 팔레르모의 대표적 유적인 노르만 궁전 안 카펠라 팔라티나(Cappella Palatina) 소성당. 노르만, 비잔틴, 이집트 건축 양식이 혼재해 있다. 성당 내부의 모자이크 작품은 비잔틴 문화의 산물이며, 정면의 모자이크 예수상은 서방 세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양식이다. /위키피디아
그의 아들 로제 2세가 '이탈리아의 노르만 정복'의 대업을 완성했다.
그는 아버지와 사촌으로부터 시칠리아와 몰타 제도, 아풀리아 등의 영토를 물려받아 한 단위의 정치체로 만들었고, 혼란한 정세를 잘 이용하여 왕국으로 승격시켰다.
교황 호노리우스가 사망했을 때 이노센트 2세와 아나클레투스 2세가 서로 자신이 정당한 교황 후계자라며 다투었다.
로제는 이 중 아나클레투스 2세를 밀었고, 그는 답례로 시칠리아를 왕국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1130년 크리스마스에 로제 2세는 팔레르모에서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노르망디의 가난한 시골 귀족 자제들의 모험은 왕국 건설로 정점에 이르렀다.
시칠리아 왕국은 온갖 역사적 곡절을 겪으면서도
1861년 가리발디에 의해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될 때까지 오래 존속했다.
5. [문명의 용광로로]
노르만 궁전내 小성당 '카펠라 팔라티나'
비잔틴·아프리카·아랍·북구 문명 뒤섞여
당신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에서 운전대를 잡을 생각은 접어라.
여행 안내서의 이 경고를 무시하고 시내에서 용감하게 차를 몰면 그야말로 머리가 쭈뼛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니 차는 얌전하게 주차장에 모셔두고 편안하게 팔레르모 시내를 걸어 다니는 게 좋다.
그러면 사방에 산재한 위대한 문화유산들을 찬찬히 음미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가 융성했던 시칠리아 왕국의 로제 2세가 걸친 망토에는 ‘이슬람력 528년’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오스트리아 빈 제국국보박물관 소장. /위키피디아
지중해의 중앙에 있는 시칠리아에는 그리스, 로마, 아프리카, 비잔틴, 유대, 아랍 문화가 섞여 들어왔다.
여기에다가 11세기에 '노르만 정복'이 이루어지자 북유럽 문화 요소까지 더해졌다.
로제 2세는 아랍-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왕국을 건설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랍인, 그리스인, 유대인 공동체가 계속 남아 번영했고, 이후 다양한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로제 국왕이 걸친 망토에는 '이슬람력 528년(서력 1133~34년)'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을 정도다
(이 망토는 후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식 때 사용되었으며, 현재 빈의 제국국보박물관(Schatzkammer)에 보존되어 있다).
한마디로 시칠리아는 문화의 용광로였다. 주도 팔레르모에는 다양한 문화 융합을 보여주는 유산이 가득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르만 궁전 안의 카펠라 팔라티나(Cappella Palatina)라는 소성당이다.
로제 2세는 즉위 후 옛 아랍 요새(Qasr) 위에 궁전을 짓도록 하고, 그 안에 왕실 소성당을 두었다.
이 성당은 노르만, 비잔틴, 파티미드(이집트) 건축 양식이 혼재해 있다.
예컨대 황금색 나무 천장은 이슬람의 종유석(muqarnas) 디자인 양식이다.
반면 성당 내부의 지성소(sanctuary)에는 노르만 문화를 반영하는 디오니시우스 성인과 마르탱 성인이 그려져 있다.
한편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장대하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은 구성과 주제 면에서 비잔틴 문화의 산물이다.
이 앞에 서면 마치 비잔틴 제국의 어느 성당에 온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모자이크 예수상은 서방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판토크라토 예수상(Christ Pantocrator)'이다.
그 의미는 '전능한 예수', 모든 일을 할 힘이 있으며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예수이다.
온유하면서도 엄격하고 전능한 판관으로 묘사한 이러한 예수의 표상은 동방정교 혹은 동방가톨릭 교회에서 더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로제 2세가 왕궁 내부에 왕좌가 있는 접견실(throne room)과 소성당을 동등한 비중으로 설치한 것은 교황청과 유럽 각국 지배자들에게 자신은 이제 이 섬에 남을 터이니 누구도 시칠리아 왕국에 간섭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고 해석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11/2020081100081.html
4.15부정선거 무효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