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로 정치 선동… 지식인들이 좌파 권력에 순종하게 만들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65] 좌파 프로파간다의 선구자, 빌리 뮌첸베르크(1889~1940)
독일의 빌리 뮌첸베르크(Willi Münzenberg·1889~1940)는 오늘날에는 거의 잊힌 인물이지만
전간기(戰間期·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거대한 좌파 미디어 조직가였고 프로파간다(선전·선동)의 귀재였다.
최근 한 역사가는 그에게 ‘마르크시스트 루퍼트 머독’이라는 별명을 부여했다.
그는 정치 프로파간다를 위해 신문, 잡지, 영화, 연극 등 각종 미디어를 종합적으로 사용한 최초 인물이며,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도록 유도했다.
그가 나치의 프로파간다 전문가 괴벨스보다 한 수 위였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뮌첸베르크가 처음 능력을 발휘한 계기는 러시아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부 지역에서 발생한 극심한 기근 사태였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 미국 정부와 기독교 자선 단체가 주도하는 국제 원조 운동이 전개되자,
이것이 정치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염려한 레닌은
독일에서 활동하던 동료 뮌첸베르크에게 독자적 기근 구호 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국제노동자구호조직(Internationale Arbeiterhilfe·IAH)을 만들어
각국의 노동자 단체와 사회주의 조직을 동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영화와 사진의 힘, 최초로 인식
탁월한 조직 능력을 확인한 뮌첸베르크는 다음 단계로 신문, 잡지, 영화 분야에 발을 들여놓았다. 얼마 안 지나 그는 자본주의 미디어 그룹을 능가할 정도로 큰 조직을 만들어냈고, 참신한 사업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예컨대 소련 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영화 ‘전함 포템킨’을 독일에 들여와 공전의 히트작으로 만들었고, ‘쿨레 밤페(Kuhle Wampe)’ 등 수작 영화들을 자체 제작했다. 오늘날에는 영화나 사진 같은 이미지가 대중에게 지극히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상식이 되었지만, 뮌첸베르크야말로 이런 사실을 제일 먼저 인식한 인물이었다.
예컨대 ‘노동자 화보 신문(Arbeiter-Illustrierte-Zeitung)’은 원래 저급한 수준의 선전물이었는데, 그는 고급 종이를 사용하고 세련된 문장과 고품질 사진 작품을 배치하여 차원이 다른 선전 매체로 격상했다. 동시에 일반 노동자들의 사진 활동도 후원했다.
다음으로 뮌첸베르크는 자신이 일구어낸 조직들을 통해 지식인들을 ‘동조자(fellow-travellers·같은 길을 가는 길동무라는 의미)’로 끌어들이는 국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동조자’란 공산당에 가담하지는 않으나 적극 공감하고 후원하는 지식인들을 가리킨다.
좌파 성향이든지 적어도 중립적인 지식인 중에 평화주의 또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한 인사가 많이 있었다. 뮌첸베르크는 이런 인사들을 코민테른(Comintern·소련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를 중심으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던 통일적 조직·1919~1943) 활동에 이용했다.
관대하고 순진한 지식인 다수가 반(反)제국주의 위원회, 노동 계급 지원 조직, 중국 노동자 후원 운동, 소련우호협회 같은 단체에 참여했다. 그들은 순수한 의도로 활동했을 터이지만, 뮌첸베르크가 조직해낸 그런 단체들이 실상 코민테른과 독일 공산당의 자금·정보 지원을 통해 운영되는 일종의 위장 조직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소련에 초빙받은 일부 지식인은 ‘나는 미래를 보았다’ 같은 글을 썼다. 뮌첸베르크가 창안한 이런 운동에 힘입어 소련은 평화, 사회 정의, 약자 보호 같은 인도주의적 가치를 지켜내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나치가 권력을 잡자 뮌첸베르크는 1933년 프랑스로 피신했다. 이 시기가 뮌첸베르크의 경력에서 절정을 이룬 때다. 당시는 스페인 내전과 인민전선(1930년대 후반 파시즘과 전쟁의 위기에 처하여 결성된 광범한 반파시즘 통일전선)의 시기였다. 소련 역시 모든 진보 세력과 동맹을 맺어 문화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투쟁을 강화해 나간다는 전략을 취했다. 뮌첸베르크는 코민테른과 소련 정보국의 도움을 받으며 각종 청원, 항의 시위, 평화 운동 집회 등을 지휘하며 마음껏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지 보여준 사례가 불가리아 출신 공산주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재판이다.
1933년 2월 27일 밤, 베를린의 국회의사당이 방화로 전소(全燒)했는데, 나치는 이 사건이 독일 공산당의 계획적 범행이라고 공표하고 대통령 긴급 명령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비롯한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디미트로프와 나치는 서로 상대방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때 파리에서 뮌첸베르크는 나치의 주장이 허구라는 반대 증거를 모아 발표함으로써 재판에 큰 영향을 미쳤고, 결국 디미트로프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괴벨스와 벌인 프로파간다 전투에서 뮌첸베르크가 승리를 거둔 셈이다.
이후 나치는 공개 재판 방식의 위험성을 깨닫고 다른 탄압 방법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프로파간다의 중요성을 더욱 확실하게 인식했다. 뮌첸베르크에 따르면, 이제 나치는 그의 영화 정책, 대중 선전 방식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2.독·소 불가침조약 놓고 스탈린과 불화
그로부터 얼마 후 뮌첸베르크는 스탈린과 불화를 겪게 된다. 소련은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가장 강력하고 확고한 방벽은 오직 공산주의이며, 다른 어느 세력도 여기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비(非)공산당계 좌익, 즉 사회주의자들이 파시스트와 다를 바 없는 사악한 집단이라고 매도했으며, 극도의 의심증에 사로잡혀 1937년부터 2년간 500만~700만명을 숙청하여 제거했다. 이때부터 뮌첸베르크는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소련에서 벌어지던 여론 조작용 재판을 비난했고, 특히 1939년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조약에 반대했다.
스탈린이 보기에 뮌첸베르크처럼 자기 양심을 지키려 하고 권력 당국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결정적 시기에 배반할지 모르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뮌첸베르크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으며 트로츠키주의자, 다시 말해 제거해야 마땅한 최악의 분파주의자 취급을 당했다.
이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자료가 앞서 언급한 디미트로프의 일기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그는 코민테른 의장으로 승격했고, 스탈린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일했다. 1933년부터 1949년까지 디미트로프가 쓴 일기가 최근 출판되어 이 시기에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내밀한 측면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은 디미트로프에게 이런 지시를 내렸다. “뮌첸베르크는 트로츠키주의자야. 그가 소련에 오면 주저 없이 체포해야겠어. 그 자를 잘 유인해 보게.” 그렇지만 뮌첸베르크는 스탈린의 ‘초빙’에 응하지 않았다. 사실 소련으로 불러들여 처치하지 않고도 다른 방법이 있었다.
1940년 가을, 뮌첸베르크는 스위스 가까운 산골 마을에서 나무에 목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그가 살해당했다면 그를 죽인 자들은 히틀러 세력일까, 스탈린 세력일까?
사실 소련의 비밀 경찰과 나치 게슈타포 모두 그를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어느 하나 분명치는 않으나 스탈린의 사주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뮌첸베르크 본인도 소련 비밀 경찰이 자기를 살해할지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독일 공산당 당원이었다가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껴 영국으로 망명한 작가 케스틀러(Arthur Koestler) 또한 뮌첸베르크의 죽음에 대해 이런 평을 쓴 적이 있다.
“1940년 여름, 그는 끔찍하고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살해당했다.
이런 경우 늘 그러하듯 살인자들은 밝혀지지 않고 간접적인 실마리만 있는데, 그것들은 자침이 극점(極點)을 향하듯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이 또한 추측에 불과할 뿐 명확한 사정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3.[진보 지식인들]
피카소·네루다… 1948년 소련이 주도한 지식인대회에 대거 참석
뮌첸베르크는 오토 카츠(Otto Katz) 같은 수하들을 시켜서
전 세계로 돌아다니며 모금 운동을 하고
각종 국제 대회에 명사들
(아인슈타인, 네루, 앙드레 지드, 말로, 발터 그로피우스,
파울 클레, 업턴 싱클레어, 토마스 만, 버트런드 러셀 등)이 참석하도록 만들었다.
뮌첸베르크는
내심 지식인들을 경멸했으나
이들의 순진함과 자만심에 아부하면서 그들을 이용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전후하여 소련 당국은 뮌첸베르크 같은 인물보다는 명령에 순종하는 관료를 선호했다.
관료들은
지식인들에게 아부할 것이 아니라
거칠게 다루면 오히려 좋아하고 따라온다고 판단했다.
1948년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서 개최된 ‘평화를 지키기 위한 세계 지식인 대회’에
폴 엘뤼아르, 피카소, 네루다, 헉슬리 같은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이 회의에서 소련작가동맹 지도자 파데예프는 ‘서구의 데카당스 문화’를 강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펜을 쥔 자칼’이라고 불렀다.
당대 한 증인에 따르면 피카소는 번역 수화기를 뽑아버렸고 폴 엘뤼아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프랑스 작가 베르코르는 소련 당국에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지식인들이 좌파 권력에 순종하도록 유도한 것이야말로 뮌첸베르크의 업적이었다.
그 자신은 사라졌어도 그가 만들어낸 방식은 오래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