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대.역사학 한명기교수강의
임진왜란당시 조선주변의 국제정세를 잘 설명해주는 강의
이강의를 듣고 거의 충격을 받았다. (조선,일본,명,후금을 전부 이해해야 되는데 그관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전혀 모르고 있었음에 통감한다.
http://ebs.daum.net/historylecture/episode/24486 원본주소
(참고관련주소.광해군 http://ebs.daum.net/especial_3/episode/4306)
역사특강 - 제45부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1강 - "왜 병자호란을 기억해야 하는가?"
방송일 2013.10.03 | 재생 536 시청자게시판
<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에 종료된 청의 침략 전쟁이다. 1592년에 경험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미 쇠퇴한 조선은 병자호란이 시작한 지 두 달여 만에 청에 항복하였다.
철기(鐵騎)로 무장한 청 아래, 인조는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45일 만에 남한산성에서 항복하였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청 태종에게 행했다. 하지만 조선의 치욕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백성이 당한 고통은 더욱 처참했다. 당시 청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만 50만 명에 달한다. 심양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노비로 전락하였고 많은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청에게 항복하는 조건으로 맺은 협약 내용 11가지 조항 중에서 ‘만주 땅을 밟은 포로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만일 도망가더라도 조선에서는 청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내용 때문에 힘들게 고향 땅을 찾은 포로들은 자결하거나 다시 청으로 돌아가는 등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한반도와 패권싸움>
병자호란을 비롯하여, 한반도는 기존 강대국과 부상하는 신흥세력의 패권다툼 사이에서 네 차례 전쟁을 겪어왔다. 홍건적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청일전쟁이 그것이다.
14세기 후반 원명교체로 인한 홍건적의 침입을 겪었고, 16세기 중·후반 명나라를 침략하겠다는 구실로 그 길목에 있는 조선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이후 17세기 초반에 명청교체로 인해 병자호란을 겪었으며,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서양의 강국들이 아시아로 진출하였다. 영국과 청나라간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일본은 이에 힘입어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전쟁 또한 조선을 비켜가지는 않았다.
<현대 G2>
미국과 중국 중심의 현재 시대를 흔히 G2 (Group of 2) 시대라고 말한다. G2세력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만일 두 강대국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불어올 폭풍은 자명한 사실이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던 전쟁, 병자호란! 역사 속에서 찾는 반면교사, 과거에 경험했던 병자호란의 참상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에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에 종료된 청의 침략 전쟁이다. 1592년에 경험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이미 쇠퇴한 조선은 병자호란이 시작한 지 두 달여 만에 청에 항복하였다.
철기(鐵騎)로 무장한 청 아래, 인조는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45일 만에 남한산성에서 항복하였다. 삼전도에서 인조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청 태종에게 행했다. 하지만 조선의 치욕은 이것뿐만 아니었다. 백성이 당한 고통은 더욱 처참했다. 당시 청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만 50만 명에 달한다. 심양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노비로 전락하였고 많은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청에게 항복하는 조건으로 맺은 협약 내용 11가지 조항 중에서 ‘만주 땅을 밟은 포로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만일 도망가더라도 조선에서는 청에 돌려보내야 한다’는 내용 때문에 힘들게 고향 땅을 찾은 포로들은 자결하거나 다시 청으로 돌아가는 등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한반도와 패권싸움>
병자호란을 비롯하여, 한반도는 기존 강대국과 부상하는 신흥세력의 패권다툼 사이에서 네 차례 전쟁을 겪어왔다. 홍건적의 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청일전쟁이 그것이다.
14세기 후반 원명교체로 인한 홍건적의 침입을 겪었고, 16세기 중·후반 명나라를 침략하겠다는 구실로 그 길목에 있는 조선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이후 17세기 초반에 명청교체로 인해 병자호란을 겪었으며,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서양의 강국들이 아시아로 진출하였다. 영국과 청나라간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일본은 이에 힘입어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켰으며, 이 전쟁 또한 조선을 비켜가지는 않았다.
<현대 G2>
미국과 중국 중심의 현재 시대를 흔히 G2 (Group of 2) 시대라고 말한다. G2세력 영향권에 속해 있는 한반도! 만일 두 강대국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된다면,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불어올 폭풍은 자명한 사실이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던 전쟁, 병자호란! 역사 속에서 찾는 반면교사, 과거에 경험했던 병자호란의 참상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역사특강 - 제46부 G2시대에 병자호란을 돌아보다 2강- 여진족의 성장과 조선의 위기
방송일 2013.10.10 | 재생 64 시청자게시판
<여진족>
발해 멸망 후 고려와 거란에 예속되어 있던 여진족은 아골타를 수장으로 1115년부터 금나라를 세워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234년 몽골, 남송 연합군의 공격으로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고 여진족은 또다시 동북지역에서 유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명나라 초기 여진족은 야인여진, 해서여진, 건주여진 세 부족으로 나뉘어 생활하였는데, 명나라는 과거 금을 세웠던 아골타와 같은 새 지도자가 등장을 우려하여 위소를 설치해 여진족을 견제하였다.
1583년 건주여진 부족장 왕고가 명나라의 심양을 공격하였고, 그에 따른 명나라는 이성량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왕고(건주여진)는 해서여진으로 도주하였으나, 해서여진은 이성량에게 왕고를 넘겨주어 그는 북경에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왕고의 아들 아타이(건주여진)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해서여진을 공격하였고 다시 파견된 명나라 이성량의 6만의 군대에 밀려 아타이는 고륵채라는 성에 포위당하게 된다. 같은 여진족인 누르하치(건주여진)와 그의 아버지 타쿠시, 그리고 할아버지 교창가는 명나라 이성량에 대한 충성으로, 명나라 편에 참전하였다. 아타이의 아내와 사촌이었던 타쿠시와 교창가는 아타이에 항복을 권유하러 고륵채로 나서지만, 명나라 진영에서 날아온 총을 맞고 타쿠시와 교창가는 사망한다. 누르하치는 부조피살의 대가로 명으로부터 교역 칙서 30통과 말 30필을 배상금으로 지급받았고 그 칙서를 이용하여 산삼, 모피, 진주의 유통로를 장악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1588년 누르하치는 부를 이용해 군사력을 키워 부조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명나라를 공격 하였다. 누르하치는 압록강까지 계속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 당시,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공격해왔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누르하치는 조선이 원하면 임진왜란에 원병 파견을 지원해준다고 제안했지만, 여진족을 오랑캐로 여겼던 조선은 누르하치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조선은 그 이후 계속해서 누르하치에 대한 압박을 느끼게 된다.
1608년, 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남긴 피해 문제와 계속되는 주변국들의 위협 속 과제를 안고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만력제가 보내준 원병에 대한 조선의 보은을 원하고 있었고, 누르하치 세력도 계속된 압박을 가하였다. 이러한 계속 된 명과 청(후금)의 위협 속에서 조선은 어떠한 대안과 대책을 가지고 위기에 대처했는지 알아본다.
발해 멸망 후 고려와 거란에 예속되어 있던 여진족은 아골타를 수장으로 1115년부터 금나라를 세워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1234년 몽골, 남송 연합군의 공격으로 건국 120년 만에 멸망하였고 여진족은 또다시 동북지역에서 유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명나라 초기 여진족은 야인여진, 해서여진, 건주여진 세 부족으로 나뉘어 생활하였는데, 명나라는 과거 금을 세웠던 아골타와 같은 새 지도자가 등장을 우려하여 위소를 설치해 여진족을 견제하였다.
1583년 건주여진 부족장 왕고가 명나라의 심양을 공격하였고, 그에 따른 명나라는 이성량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왕고(건주여진)는 해서여진으로 도주하였으나, 해서여진은 이성량에게 왕고를 넘겨주어 그는 북경에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왕고의 아들 아타이(건주여진)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해서여진을 공격하였고 다시 파견된 명나라 이성량의 6만의 군대에 밀려 아타이는 고륵채라는 성에 포위당하게 된다. 같은 여진족인 누르하치(건주여진)와 그의 아버지 타쿠시, 그리고 할아버지 교창가는 명나라 이성량에 대한 충성으로, 명나라 편에 참전하였다. 아타이의 아내와 사촌이었던 타쿠시와 교창가는 아타이에 항복을 권유하러 고륵채로 나서지만, 명나라 진영에서 날아온 총을 맞고 타쿠시와 교창가는 사망한다. 누르하치는 부조피살의 대가로 명으로부터 교역 칙서 30통과 말 30필을 배상금으로 지급받았고 그 칙서를 이용하여 산삼, 모피, 진주의 유통로를 장악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1588년 누르하치는 부를 이용해 군사력을 키워 부조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명나라를 공격 하였다. 누르하치는 압록강까지 계속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 당시, 일본을 통일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공격해왔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누르하치는 조선이 원하면 임진왜란에 원병 파견을 지원해준다고 제안했지만, 여진족을 오랑캐로 여겼던 조선은 누르하치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조선은 그 이후 계속해서 누르하치에 대한 압박을 느끼게 된다.
1608년, 왕으로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남긴 피해 문제와 계속되는 주변국들의 위협 속 과제를 안고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만력제가 보내준 원병에 대한 조선의 보은을 원하고 있었고, 누르하치 세력도 계속된 압박을 가하였다. 이러한 계속 된 명과 청(후금)의 위협 속에서 조선은 어떠한 대안과 대책을 가지고 위기에 대처했는지 알아본다.
'3. 생각하는 여유 > 1.책.시.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꽃과 비내리는 풍경 (0) | 2014.02.17 |
---|---|
보리심 가사(찬불가) (0) | 2013.10.18 |
광해군의 밀지 (0) | 2013.10.12 |
혜민스님의 선방일기 (0) | 2013.10.11 |
왜 마키아벨리인가. 중앙일보,박보균기자 (0) | 2013.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