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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개발체제 대안 없이 폐기, 알맹이 빠진 '세계화'…외환위기 불렀다~김영삼 정부는 일대 위기로 끝나는 비극의 출발

언제나오복의향기 2019. 6. 14. 06:00

개발체제 대안 없이 폐기,

알맹이 빠진 '세계화'…외환위기 불렀다

김영삼 정부~대한민국의 혼란을 개시하다

입력2019.06.07 18:18 수정2019.06.08 13:20 지면A16

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56) 위기 엄습
개발체제 대안 없이 폐기, 알맹이 빠진 '세계화'…외환위기 불렀다


김영삼 정부~대한민국의 혼란을 개시하다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을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로 간주했다.
야당 정치인으로 오래 투쟁하는 사이 그는 대한민국의 45년 역사를
부정부패와 대외종속의 비도덕적 과정으로 비판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그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어느 동맹도 민족을 대신할 순 없다”고 외쳤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것은 그의 정부가 일대 위기로 끝나는 비극의 출발이었다.

취임 후 그는 국회의사당, 중앙청, 국립박물관으로 활용돼온,
동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아온 서양식 건축물의 해체를 지시했다.
당초 조선총독부 청사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광화문 거리는 그 정신에서 조선왕조의 육조거리로 환원했다. 1995년 그는 해방 50주년을 기념해 전국 산지에 박힌 쇠말뚝을 뽑는 소동을 벌였다. 일제가 민족정기의 차단을 위해 박은 것이라는 풍수가의 황당설을 믿어서였다. 그는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이 반포한 국민교육헌장을 폐기했다. 국민교육헌장은 1949년의 교육법이 제창한 ‘신체건전’, ‘애국애족’, ‘민족문화’, ‘과학정신’, ‘자유시민’, ‘예술정서’, ‘근검노작’의 가치를 총합한 것이었다. 김영삼 정부가 새롭게 표방한 교육 이념은 ‘민주화’, ‘자율화’, ‘창의력’, ‘인성 함양’인데, 실은 아무런 가치도 담지 않은 1차원적 구호에 불과했다.

개발체제의 해체

1993년 김영삼 정부는 시행 도중인 ‘제7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폐기하고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5개년 계획의 수립은 관계, 업계, 학계, 사회 각계의 고급 정보를 취합해 차후 5년간 국가경제가 성취할 과제를 공동 모색하는 통합적 기능을 발휘해 왔다. 30년을 이어온 5개년 계획 체제는 시대 변화에 맞춰 적절히 계승될 바였다. 그럼에도 대통령을 둘러싼 몇 사람의 교수 출신 경제학자의 제안에 따라 쉽사리 폐기되고 말았다. 그들은 고도성장을 견인한 개발체제의 한국적 특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신경제 5개년 계획은 2년도 못 돼 그 입안자가 청와대 경제수석 자리에서 물러나자 폐기되고 말았다. 경제기획원은 ‘경제 국제화 10개년 계획’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해외 순방 중 새로운 국정 방향으로 ‘세계화’를 선언했다. 대통령 참모들은 영어에 적합한 말이 없어서 ‘SEKYEHWA’로 표기해 달라고 언론에 부탁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세계화’를 위해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는 조치가 단행됐다. 기획과 예산을 담당한 경제기획원과 금융과 세제를 담당한 재무부를 통합한 것은 두고두고 후회할 최악의 선택이었다.


1996년 재정경제원은 ‘21세기 한국 경제의 비전과 발전전략’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의 ‘세계화’ 구상에 그럴듯하게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말 재정경제원의 새로운 장관으로 부임한 사람은 위의 발전전략과는 별개인 ‘21세기 국가과제’로 21개의 개혁안을 선정하고 그 추진에 집착했다. 이처럼 30년 전통의 5개년 계획을 부정한 위에 대통령, 경제장관, 경제수석의 개인적 발상으로 장·단기 경제계획이 정치이벤트처럼 발표되는 가운데 고도성장을 이끈 개발체제의 신중하고 강력한 기획, 집행, 조정의 능력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평소 서울역 주변 노숙자는 100명을 넘지 않았으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1998년 9월까지 2000명으로 증가했다.

평소 서울역 주변 노숙자는 100명을 넘지 않았으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1998년 9월까지 2000명으로 증가했다.

위기 폭발

1997년 11월 22일 정부는 보유 외환의 부족으로 대외지급 불능의 위기에 빠졌다. 이에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겠다고 발표했다. IMF는 350억달러를 긴급 지원했지만 위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위기는 그해 말 미국 정부가 나서 한국의 외국은행에 대한 채무상환을 유예시킴으로써 가까스로 진정됐다. 그 사이 환율은 1997년 8월 달러당 896원에서 1998년 1월 1701원으로 치솟았다.

그로 인해 원자재를 수입하거나 외환으로 설비금융을 받은 기업부터 도산하기 시작했다. 1998년 2월까지 1만여 개 업체가 부도를 냈으며, 68만여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도산과 실업의 고통은 그해 8월까지 이어졌다. 그해 1월부터 한국 경제는 IMF 관리체제에 들어갔다. IMF는 큰 폭의 금리 인상을 요구했으며, 그에 따라 은행의 대출금리는 위기 이전의 연 11%에서 연 19%로 상승했다. 은행은 IMF가 강요한 자기자본비율(BIS)을 충족하기 위해 기업에 대한 여신을 회수했다. 그로 인해 1998년 8월까지 1만2000여 개 업체가 추가로 도산했다. 실업률은 이후에도 계속 올라 1999년 2월 최고 8.8%에 달했다.

위기의 원인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요청’ 기사를 실은 1997년 11월 22일자 한국경제신문.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요청’ 기사를 실은 1997년 11월 22일자 한국경제신문.

도대체 이 미증유의 국난은 어떻게 발생한 것인가. 처음 몇 년간 대다수 경제 관료와 학자는 재벌의 탐욕스러운 사업 확장과 무분별한 투자에 그 책임을 물었다.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하고 은행이 부실화한 것이 대외신용을 하락시켜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이 같은 이해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위기 이전 기업의 부채비율은 국제적 기준에서 특별히 높지 않았다. 몇몇 대기업의 부도와 그에 따른 국내 금융시장의 위기는 관리할 만한 수준이었다.

위기를 몰고 온 직접적 원인은 김영삼 정부가 과격하게 추진한 금융자유화 정책이 잘못 설계된 데 있었다. 정부는 국제경쟁력을 결여한 소규모 금융회사를 무분별하게 양산했다. 위기를 초래한 주범은 1994년 갑자기 30개로 불어난 종합금융회사였다. 정부의 국제금융에 대한 감독은 허술하고 비체계적이었다. 재정경제원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재무부의 국제금융국이 사라졌다. 국제금융에 대한 감독권은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으로 분산됐으며, 두 기관은 주도권을 다투었다. 정부는 오랜 관행에 따라 장기 해외차입에 대해서는 갖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부과했지만, 새롭게 개방한 단기차입 시장에 대해서는 조건이나 한도를 묻지 않았다.

치명적인 결함은 해외로 진출한 금융회사가 현지에서 차입해 현지에서 대출한 오프쇼어(offshore)에 대해 정부가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기 이후에야 밝혀진 바이지만, 위기 이전의 오프쇼어 규모는 509억달러에 상당했으며 그중 75%가 단기부채였다. 1997년 9월 한국의 대외부채는 총 1706억달러에 달했으며, 그중 1040억달러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이탈할 수 있는 단기부채였다. 당시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은 330억달러에 불과했다.

체제의 실패와 IMF의 실수

위기의 폭발을 재촉한 것은 통합적 규범력을 현저히 상실한 한국 정치와 관료집단이었다. 1997년 발생한 몇몇 대기업의 부도를 처리하는 과정은 정부의 기업정책이 포퓰리즘 정치로 얼마나 심하게 오염됐는지 국제시장에 그대로 보여줬다. 재경원 장관을 비롯한 책임 부서의 엘리트 관료들은 위기가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위기는 ‘기업의 실패, 금융의 실패, 정책의 실패, 경제외교의 실패 등 시스템 전체가 총체적으로 붕괴한’ 결과였다. ‘경제외교의 실패’란 오만한 관료들이 미국 월가 거물의 한국 정부 방문을 문전박대한 것을 말한다. 모욕을 받은 그 사람은 미국 재무장관으로 발탁됐으며 위기의 한국 경제는 그 사람의 처분에 맡겨졌다.

IMF는 지나치게 과격한 금융긴축을 강요함으로써 필요 이상의 큰 피해를 한국 경제에 안겼다. 한국에서 범한 IMF의 실수는 이후 IMF가 다른 나라의 경제에 개입할 때 다시 범하지 말아야 할 교훈으로 남았다. IMF가 통화·금융정책을 넘어 산업·기업정책에까지, 심지어 무역정책에까지 깊이 개입한 것은 내정간섭이었다.


IMF가 기업에 강요한 ‘부채율 200% 이하’란 기준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즉흥적 발상이었다. 은행의 BIS 자기자본비율을 8%로 높인 것은 은행의 기업금융을 마비시켜 불황을 필요 이상으로 심화시켰다. 강요된 부채율과 BIS 비율을 충족하기 위해 기업과 은행은 보유 자산을 팔아야 했으며, 살 사람은 외국인뿐이었다. 개략적인 추계에 의하면 이후 10년간 3000억달러 규모의 국내 자산이 외국인 수중으로 넘어갔다. IMF의 횡포에 대해 때마침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투항주의적 자세를 취했다. 한때 민족주의적인 대중경제론을 주창한 김대중 대통령은 영미형의 자유시장경제야말로 우리의 갈 길이라고 국민을 설득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한국 지성의 위기에 있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