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88>
서울서 남진 멈춘 펑더화이…울화 치민 김일성 격렬 항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평북 창성군 대유동에서 두 차례 전투를 지휘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밀리자 새로운 지휘부 자리를 물색했다.
1950년 12월 10일, 평남 성천군 신성천 서수동으로 이전했다.
이틀 후, 미 공군기가 서수동 일대를 맹폭했다. 지원군 사령부는 심야에 서수동을 떠났다. 군자리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의자·물잔 던지며 난투극 일보 직전
펑더화이 “세 번 모두 이겼다지만
우리 손실 심각하고 적 20만 건재”
군자리 중·조 회의 보급부족 호소
‘동북왕’ 가오강이 항미원조 주도
전쟁자금·비행기 헌납 줄이어
“미군 한반도서 퇴출 시키는 것은 불가능”
군자리는 묘한 지역이었다. 발가락처럼 생긴 지하갱도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내부도 서로 연결되고 공간도 넓었다.
대형 회의 장소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미군기에 발각될 염려도 없었다.
6·25전쟁과 북한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군자리 회의’도 여기서 열렸다.
중국지원군과 북한군은 연합작전을 폈지만, 삐걱거릴 때가 많았다.
펑더화이가 김일성과 마오쩌둥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명령은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
통일된 지휘체계 수립이 절실하다.” 김일성도 공감했다.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머리를 맞댔다. 두 번째 회담에서 연합사령부 설립에 합의했다.
1951년 1월 초, 서울을 점령한 펑더화이는 남진을 중지했다. 김일성은 울화가 치밀었다.
군자리에 나타나 펑더화이와 회담했다.
말이 좋아 회담이지 살벌했다. 의자와 물잔 집어던지며 난투극 일보 직전까지 갈 지경이었다.
진정되자 펑더화이가 대전략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우리 모두 성질이 급해서 탈이다. 마오 주석이 너를 존중하라고 했다”며 입을 열었다.
“지원군의 손실이 심각할 정도에 이르렀다. 세 번 모두 이겼다고 나대지만, 사망자와 부상자가 너무 많다.
마오 주석의 아들까지 불덩어리에 휩싸였다.
전쟁은 보급이 중요하다.
용맹이나 정신력은 몇 시간 지나면 쓸모가 없다.
지금 우리는 휴식이 필요하다. 적은 아직도 20만이 멀쩡하다.
부산에 쭈그리고 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평택·영월·제천·삼척 일대에서 우리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중요한 시점이다. 준비 없이 싸우는 것은 모험이다.
정치적인 변화가 있으면 모를까,
미군과 그 졸개들을 한반도에서 퇴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람은 중·조 양군 고급간부 회의를 열기로 합의했다.
1월 25일 새벽, 군자리 연합사령부에서 회의가 열렸다.
정식 대표 60명과 참관인 62명, 총 122명이 한자리에 모인 대형회의였다.
김일성이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원과 군 지휘관들 거느리고 회의장에 나타났다.
덩화(鄧華·등화)와 천껑(陳賡·진갱)을 양옆에 거느린 펑더화이가 동북 인민정부 주석 가오강(高崗·고강)과 함께 일행을 맞이했다.
가오강과 천껑의 등장은 참석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1. 가오강은 동북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동북의 모든 기관에는 스탈린과 가오강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무슨 행사건 가오 주석 만세를 불렀지 마오 주석 만세는 부르지 않았다. 가오강은 알아도 마오쩌둥은 모르는 동북인이 많았다. 마오쩌둥도 동북왕이라고 불렀다.
2. 천껑은 국공전쟁 말기 윈난(雲南)을 점령한, 전설적인 군사가였다.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장제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저우언라이를 만나면서 장제스와 다른 길을 걸었다. 1차 국공합작 파열 후에는 저우언라이와 함께 상하이의 지하공작과 배신자 제거를 주도한 신비투성이였다. 말 한마디를 해도 운치와 유머가 넘쳤다. 욕을 해도 품위가 있었다. 다들 좋아했다.
윈난 해방 후, 천껑은 호치민의 초청을 받았다. 보응우옌잡과 함께 국경지역의 프랑스군 봉쇄 전략을 세웠다.
훗날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에 승리한 것은 천껑의 기본전략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껑은 지하 공작자 시절 문호 루쉰(魯迅·노신)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김일성도 중학시절 루쉰의 애독자였다.
5일간 계속된 회의 기간 중, 쉬는 시간만 되면 천껑과 함께 루쉰 이야기 나누며 즐거워했다.
‘국공내전의 전설’ 천껑, 군자리 회의 등장
한 화가가 천껑(왼쪽)과 루쉰의 만남을 판화로 남겼다. [사진 김명호]
지원군 정치부 주임 두핑(杜平·두평)이 개회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미군 폭격기가 시도 때도 없이 소란 피우는 바람에 깃발도 생략했다. 표어나 구호도 붙이지 않았다. 만장일치로 스탈린 원수와 마오쩌둥 주석을 대회 주석단 명예주석에 추대했다.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김웅· 박일우와 펑더화이· 가오강· 덩화· 쑹스룬 등 아홉 명으로 주석단을 구성했다.
나는 비서장을 맡았다.”
김두봉이 개막사를 하고 펑더화이가 그간 전투과정을 보고했다. 분단 토의도 활발했다. 훙쉐즈(洪學智·홍학지)가 후근(后勤)공작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지원군의 후근공작은 문제가 많다. 물자 공급이 수준 이하다. 어느 부대건 먹지 못하고, 탄약이 부족하다. 부상병 치료도 엉망이다. 제공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90일간 세 차례 전쟁 치르며 자동차 1200대를 손실했다. 앞으로 3400대가 필요하다. 현재 100여 대 남아 있다. 열차 이용한 신속한 조달 바란다.”
두핑이 미국과 중국을 비교했다. “1950년 미국은 철강 8772만t을 생산했다. 우리는 60만t이 채 안 된다.
미국이 3만1000대의 군용비행기를 보유한 것에 비해 중국은 200대도 못 된다.
미군 1개 군의 화력은 탱크 430대와 고사포를 포함한 대포 1500문이다.
미군 공포증이 만연될까 우려된다. 대적 공포증에 사로잡힌 군대는 패하고야 만다. 동북은 우리의 후방기지다. 가오강 주석은 나의 요구를 경청하리라 믿는다. 정치 공작도 중요하다. 전쟁이 끝나면 조선 민중이 우리를 혐오하지 않도록, 정치교육에 힘써 줄 것을 당부한다. 병사들에게 아랫도리 조심하고, 대소변 아무 데나 갈기지 말고, 침 함부로 뱉지 말라는 것부터 가르쳐라.”
훙쉐즈의 발언은 설득력이 있었다. 동북으로 돌아간 가오강이 팔을 걷어붙였다.
중국 전역에 항미원조 위원회가 결성됐다.
헌금과 군용비행기 헌납이 줄을 이었다.
간 큰 사기꾼들도 제철을 만났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계속>
국기에 대한 맹세-1974년
: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자유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