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각하는 여유/4.역사 이야기

대장정’의 진실 패주를, 장엄한 서사시로 바꿔 ~천하 평정한 마오쩌둥의 언어 마술~敵進我退 敵駐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追)』- 유격전술 16자~

언제나오복의향기 2019. 9. 27. 06:00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다천하 평정한 마오쩌둥의 언어 마술

[중앙선데이]입력 2019.09.21. 00:02

https://news.joins.com/article/23582758

    敵進我退 敵駐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追)-마오 유격전술의 상징 16자다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신중국 70주년·마오쩌둥 혁명 유적지의 말과 글

 

   

징강산 박물관의 마오쩌둥 시(서강월)와 산 주변의 기념 조형물. ‘승리의 나팔소리’()붉은 깃발’.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은 마법사다. 그는 천하를 평정했다. 그는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자다. 타천하(打天下)’의 비법은 무엇인가.
 

신출귀몰한 말로 대중 장악
*‘대장정의 진실은 패주지만, 장엄한 서사시로 바꿔
 

조반유리홍위병 격발시켜
*마오쩌둥 말의 파괴력은, 논리보다 교묘함 때문

 

정권은 총대(槍杆子 창간자)에서 나온다”- 총대는 총구다. 1927년 그가 간파한 권력 이치다. 34(1893~1976) 때다.

그 무렵 그의 부대는 장제스(蔣介石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 참패했다. 말은 경험의 소산이다. 하지만 천하 질서는 미묘하다. 총으로만 휘어잡지 못한다. 장악의 다른 요소는 말과 글, 붓대(筆杆子 필간자). 마오는 무()와 문()을 절묘하게 엮었다. 그 조합으로 타천하가 완성된다.
 
마오는 언어의 마법사다. 중국 전문가 김명호 박사는 이렇게 정리한다.

마오는 말의 힘을 터득한 언어전략과 선전선동의 대가다.

장제스가 국공(國共)내전에서 패배한 것은 선전선동에 미숙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언어학자 후쑹타오(胡松濤 호송도)는 그 세계를 해부했다. (毛澤東影響中國的 88個關鍵詞 모택동영향중국적 88개관건사)
 
마오의 언어는 신출귀몰(神出鬼沒)이다. 나는 그 말과 글을 찾아 중국으로 떠났다.

 징강산(井岡山 정강산)샤오산(韶山 소산)옌안(延安 연안)이다.

지난 7월 서울에서 후난(湖南 호남)성의 창사(長沙 장사)로 날아갔다. 창사장시(江西 강서)성의 난창(南昌 남창)은 고속철(1시간35) 이동이다. 다음날 중국인 지인 저우쉐펑(周學鵬 주학붕·59)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그는 자동차 딜러다. 난창~징강산은 4시간쯤(340km) 걸렸다.
  




   

옌안 혁명기념관의 대장정 지휘부 조각상. (왼쪽부터) 류사오치·마오쩌둥·주더·저우언라이.

세는 아늑한 초록이다. 어느 순간 붉고 험악하다(평균 높이 1000m 이상). 안내판은 붉은색. ‘징강산 투쟁, 홍색혁명 요람.’ 마오는 도시에서 실패했다(추수봉기). 192710월 그는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수호전의 양산박 분위기였다. 그는 산적·농민들을 합류시켰다. 19284월 주더(朱德 주덕)의 군대가 산에 들어왔다. 난창봉기 패잔병들이다. 주더와 마오의 군대는 합쳤다. 공산당 군사조직인 홍군(紅軍)은 재편됐다. ‘홍군제4의 탄생이다.
 
우리는 먼저 징강산 혁명 박물관으로 갔다. 전시실의 글귀가 시선을 잡는다.

적진아퇴 적주아요 적피아타 적퇴아추

(敵進我退 敵駐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追)-마오 유격전술의 상징 16자다.

적이 전진하면 아군은 후퇴, 머무르면 교란, 지치면 공격, 후퇴하면 추격한다.” 그 바탕은 손자병법이다.
 
한국 학계의 마오 연구 고전은 고()김상협 고려대 총장의 모택동 사상이다. 그 책은 마오 전법을 분석한다.

16자 용병의 절묘함은 전진과 후퇴, 집결과 분산의 융통성에다 신속한 상호 전환을 하는 데 있다.”

유격 전법은 군대와 민심을 묶으면서 정밀해진다.어수불능분리(魚水不能分離:홍군과 인민은 고기와 물, 나눌 수 없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전시실에 창··화승총도 있다. 산적수준이다. 그런 부대에 장제스 군대가 당했다.

16자 전술의 위력이다. 마오의 시가 걸려 있다. 제목은서강월(西江月) 징강산. 19288월 징강산의 험준한 황양계(黃洋界)전투를 묘사했다.

산 아래 깃발이 보이고, 산머리에 북소리 들려온다

(山下旌旗在望 山頭鼓角相聞 산하정기재망 산두고각상문)그곳에서 열세의 홍군은 대승했다. 산 유적지에 그 시와 어울리는 조각물들이 서 있다.
 
전시실 입구 조형물은 올림픽 성화대 같다. 거기에 적힌 구절은성성지화 가이료원(星星之火 可以燎原: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다)- 그 말은 민담이다. 마오는 그 말을 낚아챘다. 그런 말은 도전과 투지로 전염된다. 징강산 투쟁은 마오 신화의 출발점이다.
 
나는 남산공원으로 갔다. 꼭대기는 엄청난 횃불 조형물이다. 두 손으로 꽉 쥔 형상은 강인하다. 거기에 적힌 성화상전(星火相傳)글씨는 압도적이다. 친구 저우가 안내문을 읽어 준다. 작은 불씨로 시작한 징강산 혁명 정신이 대대로 전해지기 위해 201710월 세웠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장제스의 공격은 집요했다. 193385차 소공(掃共·공산당 소탕)50만 대군의 포위망이다. 마오 전술도 한계다. 3410월 홍군의 주력은 대륙 서쪽으로 탈출했다. 대장정(大長征)의 시작이다. 출발지는 징강산 아래 간저우(赣州 감주)시 위두(于都 우도). 중화소비에트 임시정부 거점인 루이진(瑞金 서금) 옆이다. 전시문은 강렬하다.

장정은 11개 성(18개 산맥+24개 강)을 돌파, 1년여간 12500km를 행군한 역사의 기적이다.”
 
다음 방문 장소는 마오의 고향. 우리는 난창으로 돌아갔다. 창사를 거쳐 상탄(湘潭 상담)의 작은 도시 샤오산으로 갔다(차량 2시간). ‘마오 기념원은 방대한 공원이다. 그곳 마오의 옛집은 중농 집안 규모다. ‘구학지로(求學之路 배움의 길)’편액이 걸려 있다. 거기에 10대 시절 마오가 읽은 고전·기서들 표지와 해설이 있다. 마오는 일생 학습을 매우 좋아했다(酷愛 혹애).”

  

   

마오쩌둥 고향 샤오산 광장에 있는 마오 동상. 아래는 박보균 대기자.

오의 아버지는 지독한 수전노였다. 그는 일 안하는 자식을 혼내고 때렸다. 마오는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그 불화는 세상에 대한 저항·투쟁으로 발전했다. 친구 저우가 4자성어를 응시한다. 하늘··사람과 맞서는 분투(奮鬪)의 즐거움이다. 저우는 마오의 드라마를 압축한 표현이라고 했다. 마오는 반항의 아들, 기성질서에 거역하는 지도자, 세상을 뒤집는 혁명가다.
 
샤오산 광장 중심은 마오의 거대한 동상이다. ‘홍색 관광단이 몰려 있다. 그들은 혁명 유적지를 순회한다. ‘마오쩌둥 기념관에 익숙한 글귀가 있다.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마오의 6·25 참전 구호다. 미국에 대항, 조선(북한)을 지원하고 집과 나라를 지키자는 것이다. 그 말은 인민동원의 수단이다. 그는 미국을 종이 호랑이(紙老虎 지노호)로 불렀다. 중국군의 한반도 진입으로 자유통일은 좌절됐다. 마오는 한국 역사의 반역이다.
 
마오의 언어는 소통이다. 대중과 익숙한 격언·속담을 인용한다.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 동풍은 상서롭다. 서풍은 혼탁하다. 미국 제국주의, 소련의 수정주의 바람이다. 중국 독자 노선의 자신감을 과시한다. 언어학자 후쑹타오는 말의 설복력은 논리에서 오지 않고 교묘·영활(靈活 융통성) 덕분이라고 했다.
 
나는 창사에서 비행기를 탔다. 목적지는 산시성(陝西 섬서)의 옌안. 84년 전 대장정의 종착지다. 그 시절 벽촌 오지다. ‘장정은 언어 분장이다. 홍군은 장제스 군대의 추격을 물리쳤다. 하지만 실제는 참담한 패주다. 출발 인원(8만명)10분의 1(8000)로 줄었다. ‘옌안 혁명 기념관에 마오의 시가 걸려 있다. 홍군은 원정의 고난을 겁내지 않고(不怕 불파) 수많은 강과 산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네(等閑 등한).” 그것으로 장정은 장엄한 드라마로 바뀌었다. 2019년 미·중 무역전쟁은 장정을 소환했다. 지난 5월 시진핑 국가주석은 장정 출발지(위두)에서 헌화했다. 화환에 마오의 글귀가 적혔다. 장정 정신은 영원히 빛난다(永放光芒 영방광망)
 
그 시절(옌안 1935~48) 마오 이론은 정교해졌다.지구전(持久戰)단어에 항일 전략 해설이 붙어 있다. ‘16자 전법의 확장이다. 권력 장악력은 교묘해졌다. 422월 그의 깃발은 정풍(整風)이다. 다른 문구도 있다.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지 꽃은 다양한 사상·예술이다. 두 개의 은유는 밝지만 어둡다. 말의 작동은 교활하다. 지식인·예술인의 자유 비평 유도마오 사상에 대한 비판 확산그 순간 반전(정풍)이다. 반체제 우파 색출·숙청이다. 그것은 마오의양모(陽謀). 음모(陰謀)는 몰래 꾸민 모략. 양모는 공개적 계략이다.  
 
마오는 말을 비튼다. 파격과 역설로 기존 언어 질서를 흔든다. 지나치면 언어의 타락, 혹세무민이다. 마오가 내놓은 어휘는 2000만 개(후쑹타오 집계). 붉은 표지의 마오쩌둥 어록이 진열돼있다. 그 소책자는 아직도 살아 숨 쉰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마오 관련 전시관의 필수 어휘다. 그것은 담론의 공허함을 경계한다. 하지만 진정한 실천자는 덩샤오핑(鄧小平 등소평)이다.
 
1959년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다. 재앙이 닥쳤다. 수천만 명이 굶주려 죽었다. 마오는 권력 2선으로 후퇴했다. 국가주석에 류사오치(劉少奇 유소기)가 올랐다. 그와 덩샤오핑의 노선은 실용이다. 마오는 권력 탈환에 나섰다. 1966년 문화대혁명(문혁)이다. 방식은 대란대치(大亂大治)의 대중 징발. 마오의 선동적인 구호는 파괴적이다.조반유리(造反有理:반란에는 이유가 있다)- 그 구절은 10대 홍위병을 격발시켰다.
 
마오는서유기의 손오공을 등장시켰다. 그는 손오공처럼 천궁을 크게 흔들라고 했다.대료천궁(大鬧天宮)이다. 손오공은 재주와 반항이다. 마오는 직설도 쏟았다.사령부를 포격하라(炮打司令部 포타사령부)- 천궁과 사령부는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 노선파) 본부. 말들은 격렬하게 전파됐다. 류사오치는 홍위병의 집단 저주로 몰락했다(6911월 사망).
 
언어의 광란이다. 하지만 그 글씨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는다. 문혁 10(1966~76)은 역사의 후퇴로 규정됐기 때문이다(‘마오의 극좌적 오류’). 문혁의 실물 어휘는 헌책방·골동품점에 섞여 있다. 마오의 통치술은 종횡무진이다. 그의 수사학(修辭學)은 권력 경영의 핵심 요소였다. 그것으로 대륙의 상상력을 장악했다. 신중국 건국 70주년(101)이다. 나는 마오의 언어 15개를 추렸다. 선택 잣대는 영향력과 짜임새, 묘미다. 리더십은 자신만의 언어를 생산·보유해야 한다. 그것은 상징자산이다. 2019년 한국 정치의 학습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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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조선 가서 외국인 포로 상대하며 많이 배워라

 

[중앙선데이]입력 2019.09.21. 00:20

https://news.joins.com/article/23582770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94>

   

우신취안은 중국지원군의 첫번째 공세에서 우리 국군과 미군을 곤혹스럽게했다. 1982년 봄, 베이징. [사진 김명호]

 

신중국은 전문외교관이 없었다. 국민정부가 배출한 외교계 인재들이 널려있었지만 같은 편이 아니었다. 해외에 파견하면 망명할 가능성이 있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팔로군(八路軍)이나 신사군(新四軍) 지휘관 출신 중에서 대사를 선발했다. 전쟁터라면 몰라도 외교와는 거리가 먼, 신임장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외교도 전쟁이라며 나가기 싫다는 사람들 억지로 양복 입혀서 내보냈다. 속으로 투덜대며 나가는 사람이나 내보내는 사람이나 할 짓이 못됐다. 믿을 거라곤 두꺼운 얼굴과 배우 뺨치는 연기력이 다였다. 몇 사람 빼놓곤 다 그랬다. 국제무대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속 깊고 의심 많은 것이 큰 자산이었다. 꾸역꾸역해냈다. 외교를 총괄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차세대 외교관 양성이 절실했다. 6·25 전쟁이 단단히 한몫했다. 항미원조 지원군이 관리하던 외국인 포로수용소와 판문점을 외교관 양성소로 활용했다. 실습 장소로 그만한 곳이 없었다. 외국어에 능숙한 청년들을 포로 심문관이나 회담장 속기사로 파견했다. 문혁 이후 국제무대에 널리 알려진 2세대 중국 외교관들의 회고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외국인 포로수용소가 있던 평안북도 벽동(碧潼)과 강계(江界)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판문점과 개성은 말할 것도 없다.
  

외국어학원 영어과 20명 차출 외교관으로 키우려 파견 지시

외교 무대서 맹활약한 저우난 미군 포로수용소 심문관 출신

운산서 잠복 들어간 우신취안 미 기병 1사단 160년 불패 깨

 

판문점도 중국 외교관 양성소로 활용
 

    저우난은 걸출한 외교관이었다. 홍콩반환 문제로 영국과 22차례 열린 중영회담의 중국대표단 단장직도 15번 역임했다. 대처 수상과도 여러차례 회담했다. 1984년 2월, 홍콩 스텐리베이. [사진 김명호]

저우난은 걸출한 외교관이었다. 홍콩반환 문제로 영국과 22차례 열린 중영회담의 중국대표단 단장직도 15번 역임했다. 대처 수상과도 여러차례 회담했다. 19842, 홍콩 스텐리베이. [사진 김명호]


1954년 제네바 회담을 시작으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최고 수뇌부가 외국 원수 만날 때마다 등장하는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나 냉전 시절 미국과의 대사급 회담과 1971년 키신저의 중국 방문 때 중요한 역할 했던 궈자딩(過家鼎·과가정)의 외교 생애도 출발은 판문점이었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경제학자 푸산(浦山·포산)과 리커농(李克農·이극농) 사후 중국에서 비밀이 제일 많았던 천충징(陳忠經·진충경)도 청년 시절 개성과 판문점을 오갔다.
 
마지막 신화통신사(新華社) 홍콩지사 사장 저우난(周南·주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20대 초반에 지원군이 설립한 미군 포로 수용소 심문관이었다. 홍콩이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 신화통신사 홍콩 지사장은 아무나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중국의 해외 주재 외교관 중 서열이 제일 높았다. 통신사 지사장이었지만, 국내 직함은 중국 공산당 홍콩     마카오 서기였다. 흔히들 지하 총독이나 그림자 총독이라 불렀다. 장쩌민(江澤民·강택민)이 상하이 시장 시절 가장 희망했던 자리가 신화사 홍콩 지사장이었다. 중공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우관정(吳官正·오관정)도 한때는 부지사장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었다. 저우난의 전직은 외교부 부부장과 유엔 대표였다


        
    
19501019, 국군 1사단과 미 기병 1사단이 평양을 점령했다. 그날 밤, 우신취안(吳信泉·오신천)이 지휘하는 지원군 39군도 단둥(丹東)과 장티엔(長旬) 하구에서 압록강을 도하했다. 예정된 지역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우신취안은 전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성격도 유별났다. 무슨 전투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선봉에 서야 직성이 풀렸다. 장정 시절에도 그랬고, 항일전쟁 때도 그랬다. 마오쩌둥도 후한 점수를 줬다. “전쟁에 능하고, 전쟁이 뭔지를 안다. 상대를 방심시킨 후 기습을 가해 숨죽인 채 대기하던 아군 쪽으로 몰아버리는 능력이 탁월하다.”
 
작전 지역에 진입한 우신취안은 잠복에 들어갔다. 예하 부대에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야밤에 미군 보초 두 명 생포해서 따로 심문해라.

미군 위치 파악하면 보고해라.” 미군의 영변과 박천 도달을 확인한 우신취안은 운산을 포위했다. 1111730, 총공세를 퍼부었다.

114, 방어에 실패한 미 8군은 청천강 남쪽으로 이동했다.
 
미 기병 1사단 8연대는 운산 전투에서 반 이상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미 기병 1사단은 조지 워싱턴이 독립전쟁 시절 직접 창설한 기병대가 전신이었다. 160년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최정예 기계화(機械化)사단이 된 후에도 기병(騎兵) 1사단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다. 자부심이 강하고, 화력도 굉장했다.
 
지원군 총부는 포로수용소 부지를 물색했다. 정치부 보안부장은 이름난 명풍(名風)의 후예였다.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의견을 냈다. “강계와 벽동이 적합하다.” 이유도 설명했다. “강계는 인심이 후하고 전쟁에 휩싸인 적이 없다. 주민들도 배타적이지 않다. 평안도 사람치고는 순한 편이다. 중국에 인접한 벽동군은 반도나 다름없다. 동쪽에서 남쪽으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서쪽은 강과 산에 가로막혀 통행이 불가능하다. 북쪽만 육지로 이동이 가능하다. 차량 운행도 불편함이 없다. 일단 강계와 벽동지역에 분산 수용하자. 전쟁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면 벽동에 번듯한 수용소를 만들면 된다.” 펑더화이는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문제는 언어였다. 정치부에서 파견한 통역들은 영어 실력이 신통치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포로들과 오해가 그치지 않았다. 외교부에 통역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인도 공사 내정자가 정치공작대 인솔
   중국지원군의 포로가 된 미 기병 1사단 병사들. 1950년 11월 중순, 평안북도 운산. [사진 김명호]       

중국지원군의 포로가 된 미 기병 1사단 병사들. 195011월 중순, 평안북도 운산. [사진 김명호]

 

중국 외교부는 베이징 외국어학원에 공문을 보냈다. “항미원조에 자원할 사람은 외교부에 신청해라.” 광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합동결혼식 마치고 친구들과 저녁 먹던 저우난은 흥분했다. 신부 귀에 속삭였다. “내일 당장 자원하자.” 신부도 동의했다. 다음날 새벽 신혼부부는 외교부 찾아가 자원서에 서명했다.

 

   
외교부는     외국어학원 영문과 학생 20명을 추려 정치공작대를 편성했다. 저우언라이가 인도 대사관 공사로 내정된 한니엔롱(韓念龍·한념룡)을 불렀다. “인도는 다음에 나가도 된다. 정치공작대 인솔해서 조선에 가라. 외국인 포로 상대하며 많이 배워라.”
 
정치공작대는 일주일간 교육을 받았다. 2007년 봄, 현직에서 은퇴한 저우난이 재미있는 구술을 남겼다. “외교부 제 1부부장 리커농의 훈시가 인상적이었다. 2분도 걸리지 않았다. 5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내용이었다. “당과 마오 주석의 말만 들으면 된다. 경극 대사에 나오는 말처럼 아버지가 누구 때리라고 하면 때리고, 야단치라고 하면 야단치면 된다.” 6·25 전쟁 참전 초기, 중국은 이런 나라였다.
 
정치공작대는 압록강에 도달하기까지, 제 나라 땅에서도 많은 체험을 했다. 외국인 포로수용소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