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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무능한 미국 18대 대통령~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미국 18대 대통령~그러나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 영웅

언제나오복의향기 2020. 11. 3. 06:00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63]

북군 총사령관의 위용, 그러나 그가 대통령 되자 모두 불행해졌다

국회의사당 앞 그랜트 대통령 동상

송동훈 문명 탐험가

조선일보  입력 2020.10.27 03:00

 

미국은 ‘삼권분립(三權分立)’의 모국(母國)이다. 삼권분립은 국가의 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나눈다는 민주국가의 기본 원리다. 오늘날엔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미국의 국부들이 삼권분립의 토대 위에 헌법을 창조한 18세기 말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원리고 체제다. 미국의 국부들은 왜 삼권분립을 만들어냈을까? 견제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 권력의 종착지는 결국 부패와 독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그랜트의 당당한 기마상. 그는 대통령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 복장을 하고 있다.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연방을 지켜낸 군인의 자격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캐피톨의 수호자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는 국부들이 창조한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수도 중심에 있는 내셔널 몰 주변에 여러 권력 기관을 흩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 가장 거대한 건물은 ‘캐피톨(The Capitol)’이라 불리는 국회의사당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주변을 산책하며 민주주의의 성전이며 민권(民權)의 상징인 캐피톨의 웅장함에 압도당해보는 것도 괜찮다. 그렇게 캐피톨을 돌다 보면 서쪽 정면, 워싱턴 기념비와 마주 보는 위치에 세워진 거대한 기마상을 보게 된다. 캐피톨 주변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조형물이다. 그는 고독하게 홀로 높이 말 위에 앉아 있다. 사방을 네 마리 사자가 둘러싸고 있다. 기마상의 인물은 마치 캐피톨을 수호하는 듯하다. 장군 복장을 하고 있는 그는 누구일까?

 

서부의 아들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1822~1885년)미국의 18대 대통령이다. 그랜트는 대통령보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사령관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역사적인 업적도 대통령보다 장군으로서가 더 크다. 오하이오주(州) 포인트 플레전트(Point Pleasant)에서 태어났다. 켄터키·인디애나주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인디애나가 1816년에 주로 승격된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극(極)서부에 해당했다. 변방에서 그랜트의 아버지는 무두장이로 생계를 꾸렸다. 아들에게 기대가 컸던 아버지는 정치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랜트를 육군사관학교에 진학시켰다(1839년). 웨스트포인트에서 그랜트는 평범했다. 졸업 성적은 39명 중 21등에 그쳤다.

 

졸업 후 그랜트는 텍사스를 차지하기 위해 미국이 멕시코와 벌인 전쟁에 참전했다(1846~1848년). 전쟁 후에는 캘리포니아로 발령이 났다.

가정적인 그랜트에게 가족과 떨어진 채 태평양 연안에서 무료하게 지내는 건 천형(天刑)이나 다름없었다.

그랜트는 점차 술에 빠져들었다. 평판도 악화됐다. 결국 불명예스럽게 군을 떠났다(1854년).

 

‘The Peacemakers’란 제목의 그림은 1865년 3월 27일 증기선‘리버 퀸(River Queen)’에서 열린 북군 전쟁 지휘관들의 역사적인 종전 전략 회의를 묘사하고 있다.

링컨(오른쪽 둘째) 왼쪽이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다. 종전 직후 링컨의 암살로 승리의 후광은 그랜트에게로 옮겨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랜트는 미국의 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위키피디아

 

고향의 가족 품으로 돌아왔지만 전직 군인 그랜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농사도 사업도 손대는 것마다 실패였다. 실의에 빠진 그랜트를 살린 건 전쟁이었다. 1861년 남부군이 섬터(Sumter) 요새를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는 예비역으로 자원입대했고, 대령에 임명됐다. 북군에는 유능한 장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그랜트의 새 출발은 순조로웠다.

 

공화국의 구세주

모든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그랜트에게는 사령관직이 그랬다.

사관생도나 하급 장교 시절에는 빛을 보지 못했던 그랜트였지만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권한을 갖게 되자 달라졌다.

탁월한 전략적 안목, 신속한 결단, 과감한 추진력으로 전장(戰場)을 지배했다.

인상적인 첫 전과(戰果)는 북군에게 켄터키주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준 도널슨(Donelson) 요새 점령이었다(1862년 2월). 이때 항복 조건을 문의해 온 남군 사령관에게 그랜트는 ‘무조건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요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압도적인 국력의 우위에도 막상 전쟁터에서 남군에 밀리고 있던 북부 사람들은 그랜트에게 열광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무조건항복’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랜트의 승리는 1863년 7월 4일 미시시피강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천험의 요새 도시인 빅스버그(Vicksburg)를 점령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남북전쟁 기간에 게티즈버그 전투와 함께 가장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되는 빅스버그 점령을 통해 그랜트는 미시시피강 전체를 북군의 통제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텍사스, 루이지애나, 아칸소 세 주가 남부연합에서 떨어져 나갔고, 남군의 전쟁 수행 능력은 더욱 위축됐다. 1864년 3월, 링컨 대통령은 그랜트를 중장으로 진급시킴과 동시에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그랜트는 특유의 거침없는 전진과 무자비한 전쟁 수행으로 링컨에게 보답했다. 그랜트가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점령하고, 남군 총사령관 리(Lee) 장군에게서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내전은 종결됐다(1865년 4월 9일).

 

무능력한 대통령

승리 직후에 찾아온 링컨의 예상치 못했던 죽음은 모두에게 큰 슬픔이었다. 특히 그랜트에게는 그랬다. 링컨은 자신을 술주정뱅이라고 험담하는 장군들에게서 지켜주고, 능력을 믿고 인정해준 은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링컨의 죽음은 그랜트에게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링컨을 감싸고 있던 전쟁 지도자의 후광이 그랜트에게로 옮아왔기 때문이다.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17대 대통령)의 온건한 남부 재건 정책에 만족하지 못했던 북부의 급진파는 전쟁 영웅 그랜트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본의 아니게 그랜트는 정치에 입문했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도 있게 마련이다. 그랜트에게는 대통령직이 그랬다. 남부의 재건과 국가의 통합이라는 시대의 과제를 군인 그랜트는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에 지친 영웅에게는 더 이상 야망도 열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에게 권력은 지나간 승리에 대한 보상에 불과했다.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남북전쟁 이후의 혼란 속에서 부정부패가 판을 치고 있었다.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백악관과 정부는 그러나, 무기력했다. 스스로가 부정부패의 온상이었으니 당연했다.

 

대통령의 매제 아벨 코빈(Abel Corbin)은 서민 경제의 기반을 뒤흔든 금값 조작 사건에 가담했다.

부통령 스카일러 콜팩스(Schuyler Colfax), 몇몇 의원과 정부 내 주요 인사들은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컸던 철도회사 크레디 모빌리에(Crédit Mobilier) 사기 계약 사건의 공범들이었다.

일부 재무부 관리는 위스키 업자들과 짜고 세금을 포탈했고,

육군부 장관 윌리엄 벨냅(William Belknap)과 그의 아내는 뇌물을 받고 막대한 이익이 보장되는 군납업자 자리를 팔았다. 대형 권력형 게이트들이 연이어 터졌으나 대통령은 오히려 관련자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영광과 오명 사이

실정(失政)의 결과는 선거에서 나타났다. 민심을 잃은 공화당은 1876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했다. 민주당 후보가 일반 투표에서 26만표 이상 더 얻었다. 그러나 몇몇 주의 선거 결과에 의혹이 제기되면서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는지가 모호해졌다. 양당은 특별선거위원회를 구성했다.

물밑 협상 끝에 특별선거위원회가 공화당 후보 러더퍼드 헤이스(Rutherford Hayes·19대 대통령)를 대통령에 지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직을 양보하는 대가로 민주당은 남부인의 각료 임명, 남부 내 연방 관리 임명권, 남부에 대한 광대한 개발, 남부에서 연방군의 철수 등 다양한 정치적 과실을 얻어냈다. 그 결과 남부는 다시 배타적인 소수 백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흑인들은 다시 노예나 다름없게 됐다. 그토록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승리했는데도 남부의 재건은 부패하고 무능한 그랜트 정권 때문에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링컨이 약속했던 자유와 권리가 흑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196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캐피톨 앞의 동상은 말이 없다. 그가 미국 사회에 남긴 상처와 오명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가 완벽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인정하는 것 또한 미국의 전통이다.

그랜트는 지금 캐피톨 앞에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북군 총사령관으로서,

부패하고 실패한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연방을 구한 영웅으로 서있는 것이다.

그는 대통령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은 전혀 없고 과만 넘치는 사람도 으스대며 살아가는 게 현실이다.

‘나는 어떠한지’ 스스로 성찰할 일이다.

 

[뉴욕의 무덤에도 ‘대통령보다 장군’]

뉴욕의 그랜트 묘를 장식하고 있는 벽화 중 하나. 그랜트가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이다. /송동훈

 

그랜트 대통령의 무덤은 뉴욕 맨해튼(Manhattan) 북부 모닝사이드 하이츠(Morningside Heights)에 있다. 대부분의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에 묻힌 것을 고려하면 예외적이다. 대통령직에서 은퇴한 후 말년을 뉴욕에서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인 줄리아(Julia 1826~1902년)가 강력하게 뉴욕에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덤은 거대한 돔과 웅장한 도리아 스타일로 구성됐는데 미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크다. 내부는 남북전쟁 당시 그랜트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벽화로 장식돼 있다. 결국 무덤에서조차 그랜트는 무능한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군인으로서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송동훈 문명 탐험가  

2017년 대통령선거 투표지

투표용지는 28cm

봉투는 22cm

 

투표용지를 접지않으면 봉투에 넣을 수 없는데

새돈처럼 그대로 뻣뻣하다.

415부정선거무효

가짜국회의원해산

가짜대통령추방

언제나 오복철학원 작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