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런저런 이야기/2. 인물여담

박종인의 땅의 역사] 26.~파란만장한 운명~친일파로 낙인찍힌 금광왕 이종만~그를 어떻게 생각하실건지.. 운명이란?

언제나오복의향기 2021. 11. 7. 06:30

박종인의 땅의 역사] 26.친일파로 낙인찍힌 금광왕 이종만

그를 어떻게 생각하실건지.. 운명이란?

 

* 첫화면에 나오는 연번 '279'는 신문기사 연재 번호입니다.

파란만장한 운명~친일파로 낙인찍힌 금광왕 이종만~그는~

박종인의 땅의 역사

 

식민시대 금광왕 이종만은

조선 농민의 한인 소작제도를 없애기 위해

금광을 팔아 농촌갱생사업을 벌였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는 지원병 모금을 하고 강연을 했다.

 

그는

친일부역자인가

민족사업가인가. 

성난돼지

4시간 전(수정됨)

역사를 특정 목적을 위해 작은 부분만 보는 것은 참 어리석고 위험합니다.

지금의 좌익 역사가들 이들이 다시는 나오지 말기를.

 

JOB BAP

7시간 전

좌파가 궁구막추로 몰릴 때 사용하는 수단이 반일입니다.

친일파로 낙인을 찍어놔야 몰릴 때 사용하기 좋죠.

 

이규봉

8시간 전(수정됨)

無所不爲의 도구 친일 저게 언제 수명을 다 할까?

역병 처럼 언제든지 다시 나타나지 싶은데 말입니다.

 

yongil kwon

9시간 전

이종만사장이 친일파 일지라도 상관없어요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노블레스오블리제 이종만사장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봉화군 춘양면 금정광산 김원태사장도 그러한 인물이였 습니다.

김원태사장 또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습니다만

김원태사장을 근대사에 존경할만한 노블레스오블리주로 평가할만 합니다.

 

RQ9 M

1시간 전

민족문제연구소와 좌익 진영의 학자 대부분이

과거사 청산을 외치면서 사례로 드는게

바로 나치에 부역했던 프랑스 비씨 정부 이야기를 하는데....

그 괴뢰정부 유지 기간도 길어야 3~4년 안이고

국제법상으로도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하물며 1910년 아주 온전하게 합법적으로 나라를 팔아 먹고

일본과 '병합' 이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국가 M&A 였는데 이게 어떻게 식민지냐!

 

그리고 태어날때부터 또는 젊은 나이게 일본황국의 황국신민이 된 조선인들이

생활인으로 열심히 먹고 살려고 아둥바둥 했던 사람들까지 다 싸잡아 친일파로 낙인찍으면

꼴에 독립운동 한답시고 핑이나 뜯으러 다니던 마적때 자식들이

간판갈이 하고 민족투사로 둔갑하는건 어떻게 생각하냐?

 

하나부터 열까지

좌익 사관 입맛에 맞게 재단을하고 양념을 치고

한번만더 생각해 보면 말같지도 않은 소릴란걸 뻔히 아는데

 

그저 아주 생각없이 주는 것만 덥석 받아 먹고

민족뽕 차서 21세기에 유니클로 불매운동하는거 보면...

욕이 절로 나온다!

 

그럼 프랑스가 2차 대전을 치르며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징병하거나 참여한 군인들은 전쟁의 공적을 올리면

식민지 모국의 발언권과 프랑스에 독립을 요구할 권리를 얻기 위해서였는데

 

왜 유독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 조선인들은

죄다 민족 반역자냐?

그리고 그들도 전범이 되어서 사형당하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되었는데

이제와서 야스쿠니에서 빼달라고 하는건 말이 되고?

 

생각이 없고

실체적 진실이 뭔지도 알아 볼려고 하지 않으면....

남에 생각에 놀아나는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내 꿈은 조선 농촌을 갱생시키는 것이외다”

279.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회사업가 이종만

서울 종로구 견지동 NH농협 종로지점 건물은 1926년 ‘조선일보’ 사옥으로 지어졌다가 ‘조선중앙일보’ 사옥(1933),

1937년 이후에는 ‘대동광업주식회사’ 본사 사무실로 사용됐다.

대동광업 사장 이종만은 ‘소작농 없는 자작농의 조선’을 꿈꾸며 함남 영평금광 매각자본 155만원으로 농촌과 교육 갱생 사업을 벌였다. 해방 후 그는 금광이 있는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박종인

 

수수께끼의 인물 이종만

‘남들은 이종만씨를 마치 조선의 로스차일드요, 카네기라고 부른다. 어떤 이는 천만장자의 몸이면서 다 찢어진 양복에 각반을 치고 손수 굴 속에 들어가 갱부(坑夫)들과 괭이 잡고 일도 하며 어떤 때는 5전짜리 전차를 타고 동대문 밖 빈민굴에 나타나 100원도 주고 1000원도 주고 돌아온다 하여 몬테크리스토 백작 모양으로 상상하는 이도 있다. 세상 여러 십만 명의 주목을 끌고 있는 이종만씨란 대체 어떠한 인물이며 그의 사업관, 황금관은 어떠한고 필자 또한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삼천리’ 11권7호 1939년 6월호)

 

‘창랑객(滄浪客)’이라는 식민시대 잡지 ‘삼천리’ 기자는 1939년 이종만이라는 인물을 빈민굴에 적선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비유하며 그를 인터뷰했다. 이종만은 식민 조선 3대 금광왕으로 불리는 금광 갑부다.

그런데 이종만은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돼 있다. 내용은 이렇다. ‘이종만: 일본명 쓰키시로 쇼마(月城鍾萬).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위문품대’로 1000원을 기부했다.

 

1938년 10월 정주경찰서에 ‘황군위문금’을 냈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0년 7월호 ‘삼천리’에 게재된 <지원병사 제군에게>라는 칼럼에 격려의 글을 실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발췌) 친일과 반일이 세상사를 재단하는 칼날로 변해가는 이 시대,

이종만 혹은 쓰키지로 쇼마의 일생을 보기로 한다.

이종만(1886~1977)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9.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회사업가 이종만

견지동 111번지 붉은벽돌집

삼천리 기자 창랑객이 이종만을 인터뷰한 곳은 서울 ‘대동광업주식회사’ 사무실이다. 사무실 주소는 경성 견지초(堅志町) 111번지다. 거기에는 붉은 2층 건물이 있고 현판에는 금색으로 회사 이름을 새겨넣었다. 그 건물은 ‘실로 조선일보가 앉았을 적에는 이상재 옹을 위시해 안재홍, 신석우, 유진태 등 한다 하는 거인(巨人)들이 드나들며 안팎으로 사회 일을 지휘하던 자리요, 훗날 중앙일보가 되면서 여운형, 최선익 등이 또한 천하를 논하던 곳’이다.(‘삼천리’, 앞 글)

 

1926년 ‘조선일보’가 네 번째 사옥으로 만든 건물이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는 여운형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 사옥으로 쓰인 건물이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휴간한 뒤 1937년 폐간됐다.

그 이후 해방 때까지 바로 이 이종만이 운영하는 ‘대동광업주식회사’가 건물을 인수해 사용했다. 매각 비용은 9만8000원이었다.(’삼천리’ 10권10호 1938년 10월호) 지금도 남아 있는 이 건물은 농협 건물로 사용 중이다.

광산업자 이종만의 오뚝이 일생

저 거인들이 거쳐 간 건물을 인수한 광산업자 이종만의 인생은 이러했다. 이종만은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 반농반어의 마을인 울산 대현면 용잠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종만은 ‘실로 언어도단인 병마절도사의 전횡을 그저 “양반은 지엄한 존재라 여기고 억울한 삶을 계속하던” 고향 사람들’을 기억한다.(1940년 4월 3일 ‘동아일보’)

 

우리나라 나이 스무 살이 된 1905년 이후 이종만은 대실패 연속의 인생을 살았다. 러일전쟁 군수품인 ‘빨간약’ 재료로 미역이 쓰인다고 해서 부산에 미역 도매상을 차렸더니 전쟁이 끝나버렸다. 그물을 사고 어선을 사서 명태잡이를 시작했다가 전복 사고로 명태를 다 수장시켰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무기 원료인 중석(텅스텐) 가격이 폭등하면서 강원도 양구에 중석광을 차렸다. 5만원(3030년 9월 현재 10억 원: 1914년 현재 쌀값 기준·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가까이 벌었나 싶었더니 전쟁이 끝나면서 중석값이 폭락했다. 빚을 갚고 또 거지가 됐다.

 

이어 목재상을 차렸더니 홍수에 목재들이 다 사라져버렸다.(이상 1937년 6월 10일 ‘조선일보’) 최창학, 방응모 같은 금광으로 성공한 사람이 잇따라 탄생하자 1928년 이종만 또한 함남 명태동에서 금광 개발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1931년 겨울 동업자 사기극에 말려 한푼도 건지지 못하고 쫓겨났다. 가진 돈은 27전이었다.

실패밖에 모르는 사업가 이종만은 또 금광업에 매달렸다. 1934년 이종만은 채산성 부족으로 방치된 함북 영평금광을 일본인에게서 450원에 사들였다. 2년 뒤 노다지가 터졌다. 1936년 한 해에만 40만원어치가 넘는 금이 채굴됐다.

그 돈으로 이종만은 역시 함남에 있는 장진금광 개발권을 사들였다. 한 해 채금량 140만원이 넘었다. 마침내 금광왕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 것이다.

실패한 사업가의 상상초월 반전

위에 인용한 ‘삼천리’ 기자는 인터뷰 기사를 이렇게 끝맺었다. ‘말이 이에 미치매 나는 심중(心中)에 울었다. 왜 이리 이 사람을 늦게 만났냐고, 이분의 손목을 붓잡고 오래도록 울고 십헛다.’

왜 울고 싶었을까. 노다지가 터지고 딱 1년 뒤인 1937년 이종만이 그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팔아치운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찾아간 삼천리 기자 창랑객에게 이 천하갑부가 이리 말한 것이다. “이 사장의 자리란 것이 실상은 본의가 아닙니다. 나는 저 갱부들과 같이 굴속에 들어가 그네와 같이 일하고 그네를 가르치고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안하고 또 그가 소원이여요.”

 

인터뷰 2년 전인 1937년 5월 11일 이종만은 영평금광을 155만원에 매각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성에 있는 ‘천진루’라는 허름한 여관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또 다른 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이종만이 설명회를 여는 날이었다.

새 회사 이름은 ‘대동(大同) 농촌사’다. 이종만이 입을 열었다. “조선 인구 팔 할이 농사에 종사하는 만큼 조선인 생활은 농촌에 달렸고 농민의 빈궁은 가장 우리의 관심할 바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10여 년 동안 광업에 종사하다가 금전을 잡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조선 농촌 갱생을 위하여 미력이나마 드려보자고 계획을 했습니다.”(1937년 5월 13일 ‘조선일보’)

가진 돈은 모두 조선을 위해

450원짜리 금광을 155만원에 팔아치운 졸부 입에서 놀라운 발표가 줄줄 튀어나왔다. ‘155만원 가운데 50만원으로 ‘대동농촌사’를 만든다. 조선 6개 지역에 집단농장을 만들어 경작자에게 영구히 경작권을 준다. 매년 수확량의 삼 할을 의무금으로 징수해 농지 추가 매입 비용으로 쓰고, 30년 뒤에는 의무금을 폐지한다. 교육, 위생, 문화 문제를 부락민이 자치한다.

교육시설을 만들어 농촌의 중추인 청년을 양성하겠다.’ 조선 농촌의 암(癌)인 소작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이상 ‘조선일보’ 위 날짜 등) 이종만은 농장용 토지 매입을 위해 100만원을 추가로 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영평금광을 판 돈 전액을 농촌 갱생에 쓰겠다는 발표였다. 쌀값을 기준으로 1937년 150만원은 현 시가 170억원이다.(2020년 9월 현재·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기자회견 이틀 뒤 이종만은 영평금광으로 가서 전 직원과 인근 마을에 12만원을 기부하며 석별식을 치렀다. 그달 28일 이종만은 고향에 보통학교 설립기금으로 1만5000원을 기부했다.

‘대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한 이종만을 ‘문화발전에 기대가 다대(多大)한’ 사업가로 소개한 1937년 6월 10일자 ‘조선일보’. /조선일보db

또 일주일이 지난 6월 6일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 설립을 공식 발표했다. 자본금 300만원으로 장진금광을 비롯한 소유 광산을 운영할 이 회사는 광부 전원이 조합원이며, 이들은 임금은 물론 조합원으로 이익 배당을 받게 된다고 했다.(1937년 6월 9일 ‘조선일보’)

이종만은 더 이상 노다지 졸부가 아니었다. 그는 ‘문화발전에 기대가 다대(多大)한’ 사업가였고(6월 10일 ‘조선일보’),

‘가진 땅이 157만평에 불과한 것이 (조선 농촌이) 매우 섭섭해할 독지가’(1937년 9월 17일 ‘동아일보’)였다.

 

대동농촌사는 함남 영흥, 경기 연천, 평남 평원과 경남 하동에 집단농장 다섯 군데를 만들었다.

총면적은 750정보(225만평)였다. 이름은 농장이 아니라 ‘농촌’이었다. 쌀을 생산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 가운데 ‘하동농촌’은 1940년 정식으로 이종만과 농민들 사이에 ‘자작농 계약’이 맺어졌다.(방기중, ‘일제말기 대동사업체의 경제자립운동과 이념’, 한국사연구 95호, 한국사연구회, 1996)

“같이 잘살 길을 찾고자”

이종만은 이어 1937년 10월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 위기에 처한 평양 숭실학교를 120만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이 불발되자 이종만은 이듬해 평양에 ‘대동공전’을 설립했다. 이미 수십 차례 사업에 실패하는 동안에도 고향과 경성에 학교를 설립해 아이들을 가르친 이종만이었다.

 

어느덧 이종만은 대동광업주식회사와 대동농촌사와 대동출판사와 대동공전을 운영하는 대사업가가 돼 있었다. 그런데 이종만은 “2000만~3000만원이면 대학 하나 만들 수 있을 텐데 공업과 농업과 광업을 포함한 종합대학교는 꼭 만들고 싶다”고 했다. 왜? “다 같이 잘살 길을 찾자는 일 이외에는 없소이다.”(‘삼천리’ 맨 앞 글)

삼천리 기자 창랑객이 인터뷰 기사 말미에 “손목을 붓잡고 울고 십헛다”라고 쓴 이유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종만의 월북과 ‘친일인명사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금광업에 대한 총독부 지원이 중단됐다. 금광을 모체로 한 이종만의 ‘대동’ 사업체 또한 심한 자금난에 빠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총독부 기부 활동을 시작한 이종만은 1940년대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석하는 등 소위 ‘친일 활동’을 벌이다 해방을 맞았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김구와 함께 참가했다 돌아온 이종만은

그해 가을 다시 북으로 가 돌아오지 않았다.

미완으로 남아 있는 장진금광이 함경도에 있었다. 이후 이종만은 북한 정부 광업부 고문이 되었고,

1977년 죽었다. 그가 만든 대동공전 후신이 김책공과대학이다. 이종만은 지금 ‘자본가’로 유일하게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대한민국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로 규정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다. 험한 시대를 살아간 한 기업가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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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종만  근대 울산 출신의 대표적인 경제인.

2. 가계    본관은 경주. 호는 월성().

 

3. 활동 사항

이종만()[1886~1977]은 1886년(고종 23) 1월 14일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용잠리[현 울산광역시 남구 용잠동]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한학을 배웠으나 병약하여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20세에 경성으로 올라가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였다.

부산에서 어물상을 차려 미역으로 장사를 시작하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파산하고 고깃배를 타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1912년 대흥학교를 설립하였다.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를 돌면서 광산 개발을 하여 전국에 2,512㎢에 달하는 750광구를 소유하면서 ‘광산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

932년 영평금광을 인수하였다. 1936년 장진광산 개발권을 확보하였다. 소유한 광산을 근거로

1937년 6월 대동광업을 설립하고, 이어 대동광산중앙조합, 대동농촌사와 대동출판사를 세워 경영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애국부인회 조선본부에 1,000원을 기부하였고,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120만 원에 인수하고

1938년 사립 대동공업전문학교를 설립하여 경영하였다.(현. 북한 김책대학교)

1939년 이후 조선산금위원에 추천되면서 일본의 정책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본군 위문대 대금으로 1,000원을 헌납하기도 하였으며,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전시 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를 위해 전국의 조선 유림을 동원하여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을 맡았다.

1940년에는 학병 지원을 격려하는 글을 잡지에 게재하고 황도 정신의 앙양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광복 전까지 친일 활동을 하였다.

 

*친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친일보다 김일성편에 섯다는게 더 큰제인 것 같은데~

 

1946년 5월 창간된 『독립신보()』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산업건설협의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김일성()의 요청으로 1948년 월북하였다.

195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광업부 고문을 지내며 여러 지역을 탐사하며 자원을 개발하였다.

최고인민회의 2기 대의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77년 1월 19일 사망 후 애국열사능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로 알려져 있다.

 

1940년 『삼천리』 7월호에 ‘지원 병사 제군에게’라는 칼럼에

지원병과 혈(血), 한(汗) 애(愛)의 인(人)」이라는 글을 실었다.

 

묘소 -북한 평양시 애국열사능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종만 [李鍾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