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에 잠든 가야왕국의 신비… 열두줄 우륵 선율에 담겨있을까
능선에 잠든 가야왕국의 신비… 우륵의 열두줄 선율 담은~가야산의 지맥이 이어진 곳에 조성된 경북 고령군 지산동고분군.
2.4km의 능선을 따라 무려 700여 기의 고분들이 포도송이처럼 맺힌 모습이다.
능선과 봉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이 가야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둬..
동아일보 입력 2022-01-22 03:00
[여행이야기]가야고분군 역사여행
유네스코 등재 앞둔 인류문화 보고
천기의 명당인 고령 지산동고분군
교역요충지로 번성한 옥전고분군
《영남의 가야산은 가야 건국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꽃이 가장 무성하게 핀 곳 중 하나다.
하늘의 천신(天神) 이비가지와 땅의 여신(女神) 정견모주가 사랑에 빠져 2명의 가야국 창건주를 낳았다는 ‘상아덤’ 바위, 금관가야 수로왕과 허왕후가 낳은 7왕자들이 출가했다는 칠불봉 등 가야 관련 설화가 곳곳에 배어 있다.
가야산 지맥이 뻗어나간 합천, 고령의 산 능선에도 가야연맹체 소속의 고분들이 저마다 독특한 신비감을 뽐내고 있다. 올해 6월 가야산과 낙동강 일대 7곳의 가야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기도 하다. 인류 문화사적 보존 가치가 높은 가야산자락 가야고분군으로 겨울 여행을 떠나본다.》
가야산자락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 경내. 일주문과 봉황문을 거쳐 해탈문으로 들어서기 직전 오른쪽 협소한 공간에는 국사단(局司壇)이란 이름의 작은 전각이 있다. 경내의 웅장한 전각에 눈길을 주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전각 안내판은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을 관장하는 수호신이자 토지신인 국사대신(局司大神)을 모신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국사단 내부에는 우아하면서 기품 있는 한 여성과 두 아들을 묘사한 탱화가 중앙에 모셔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대가야의 건국 신화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형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두 명의 왕을 배출한 여성 산신이다 보니 대우도 남다른 듯하다. 보통 산신각이 뒤편에 배치되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이곳 국사단은 앞쪽에 세워졌다. 해인사 측은 국사대신이 재앙을 없애고 복을 내리는 등 가람을 수호하는 신이기 때문에 사찰 입구에 배치했다고 설명한다.
국사단 앞의 한 그루 ‘소원나무’도 범상치 않다.
가야산 산신이 깃든 이 소원나무에서 소원을 적고 국사단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국사단은 해인사 경내에서도 손꼽히는 명당 혈(穴)에 자리 잡고 있다. 좋은 기운이 밴 터에서 기도하면 영험함이 크다는 게 풍수적 시각이다.
사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해인사 경내에 이미 정견모주를 모시는 사당인 ‘정견천왕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통일신라시대인 802년 해인사가 창건되기 이전부터 이곳이 가야산신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
해인사에 깃든 가야 신화를 음미한 뒤, 가야산의 지맥과 정기가 이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대가야의 터전으로 알려진 고령군 지산동고분군(대가야읍 지산리). 가야산의 한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서 미숭산을 지나 고령읍의 진산인 주산(이산·310m)까지 이어진 곳이다.
1500여 년 전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지였고 지산리의 주산은 대가야 왕과 귀족들의 무덤터였다. 무려 700여 기의 고분이 주산 능선 2.4km를 따라 정상부에서 아래까지 포도송이처럼 들어선 지산동고분군은 가야 지역 최대 규모의 고분으로 유명하다. 능선과 봉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이 고분군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대상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지산동고분군은 특이하게도 산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봉분의 크기가 커진다. 권력자일수록 높은 곳에 무덤을 조성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마치 산 위의 산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산 중턱이나 평지에 조성한 백제나 신라의 고분과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9분 능선이 길게 이어지는 지맥(地脈)은
명당 기운인 혈(穴)이 맺기 어려운 과맥처(過脈處)라고 하여 기존 풍수학에서 매우 꺼린다.
그런데 가야의 고분 입지를 한국 고유의 천문지리관으로 보면 달리 보인다.
한반도 사람들은 청동기시대부터 북두칠성과 여러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겨놓을 정도로 하늘의 기운을 중시했다.
하늘의 기운인 천기(天氣)가 내려오는 명당 터 곳곳에 규모가 큰 왕릉급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천기형 봉분에서는 권력을 지향했던 대가야 사람들의 기상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하다. 즉, 지산동고분군은 하늘 에너지를 중요시한 우리 식 자생풍수 현장인 셈이다.
지산동고분군은 무덤떼라기보다는 일종의 자연 공원 같다. 야자나무 매트로 깔아놓은 고분 길은 마치 둘레길을 걷는 듯한 편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평화롭고도 운치 있는 외관과 달리
이곳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물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44호분(지름 25×27m, 높이 6m)에서는
순장자만 무려 40여 명이 나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순장무덤으로 기록됐다.
지산동고분 입구에 있는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는 발굴 당시 44호분 내부의 모습을 실제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다.
관람객들은 고분 속으로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고령군은 대가야의 중심도시답게 대가야 관련 시설물이 대거 들어서 있다. 대가야국 출신의 악성 우륵이 예술 활동을 펼쳤던 곳으로 알려진 대가야읍 쾌빈리 정정골에는 우륵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또 지산동고분군 근처에는 대가야 역사테마관광지와 대가야생활촌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역사테마관광지에서는 관광객들이 고대 문화를 첨단시설로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도록 고대가옥촌, 가마터 체험관, 토기방과 철기방 등 각종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가야산의 정기는 고령군 바로 옆의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의 야트막한 언덕으로도 이어진다. 구슬밭(玉田)으로 불리는 옥전고분군(사적 제326호)이 있는 곳이다. 지산동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대상인 이 고분군 역시 50m 높이의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수십 기의 봉분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다. 마치 낙타의 혹처럼 보인다. 이 고분들은 옛 가야연맹체인 다라국(多羅國)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옥전고분군에서는 당시 금보다 비싸게 거래된 로만글라스(Roman glass·로마제국 시기에 제작된 유리그릇)가 출토돼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다. M1호분에서 발굴된 투명 유리 재질의 로만글라스는 저 멀리 지중해로부터 건너온 것으로서, 가야와 서역 간 교류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였다.
이뿐만 아니다. 지름 21m를 자랑하는 거대 봉분인 M3호분에서는
정교하게 장식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용봉문 환두대도) 4점을 비롯해
금귀고리, 금동장식 투구, 갑옷 등 다라국의 화려한 금속공예 기법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다.
현재 옥전고분군 입구에 있는 합천박물관 전시실 중앙에는 M3호분의 출토 유물을 실물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는데, 역사 속 다라국의 활발했던 대외교역을 상상해볼 수 있다.
합천박물관에서 전시물을 살펴본 후 뒤쪽의 옥전고분군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죽은 사람들의 집터 분위기라기보다는 아담한 크기의 봉분들이 마치 자연물처럼 정겹게 다가온다. 곳곳에 산재한 명당 혈 기운 덕분에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포근한 기운이 몸을 감싸주는 듯했다.
옥전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혈(穴)이 맺힌 명당에 고분을 조성했다는 점에서는 지산동고분분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진다. 지산동고분이 권력과 명예에 도움이 되는 천기 명당이라면, 옥전고분은 풍요와 재복에 도움 되는 지기(地氣) 명당에 해당한다. 실제로 옥전고분군의 주인공들은 황강과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한 대외 교역 중계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합천에서 가야고분에 대한 역사산책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면 서울 청와대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합천영상테마파크의 청와대세트장, 합천 허굴산 자락의 천불천탑을 추천한다. 눈요깃거리도 되려니와 설날을 맞아 소원을 비는 기념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다.
글·사진 고령·합천=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121/1113687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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