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대세 거슬러 지킨 자유민주주의… 이승만 삶을 배워야할 이유다
[17] [끝] 이승만이 남긴 교훈들 복거일 소설가 조선일보 2023.12.06. 03:00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 무대에서 내려온 지 어느덧 60년이 넘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은 거의 다 그가 하야한 뒤 태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삶은 우리에게 무슨 뜻을 지니는가?
뉴욕서 '영웅 행진' 카퍼레이드 -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승만이 1954년 8월 2일 뉴욕시가 마련한 '영웅 행진' 카퍼레이드에서 뉴욕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맨 앞 차량 일어선 사람이 이승만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현장마다 함께했던 이승만은 전체주의의 위협을 경계하며 자유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힘썼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이 물음은 “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는가?”라는 물음을 부른다. 이 심중한 물음의 모범 답안은 아마도 “교훈을 얻기 위하여”일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얘기는 이런 견해를 대표한다.
그러나 방대한 역사에서 자신에게 절실한 교훈을 얻기는 쉽지 않다.
먼저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알아야, 적절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폴란드 역사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는 지적했다. “우리는 처신이나 성공의 방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역사를 배운다.” 역사에서 배우는 근본적 지식은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얘기다.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19세기 중엽에 서양 문명이 밀려오면서, 혁명적으로 바뀌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치른 서양 문명이 워낙 우세했으므로,
우리의 전통적 문명은 빠르게 서양 문명으로 대치되었다.
이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발원한 전통들이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 몇 백년 전 조선조의 우리 조상들은 우리를 몰라볼 것이다.
이승만은 개항 바로 전 해인 1875년에 태어나서 젊을 때부터 조선 역사의 중요한 현장들에 있었고 나이 들어선 나라를 이끌었다. 자연히, 그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의 눈에 들어온 사건들을 살피면, 우리는 우리 사회에 근본적 영향을 미쳐서 우리의 정체성을 다듬어낸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주의의 위협---
이승만의 마음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한 것은 러시아의 위협이었다. 그는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 러시아를 실제로 경험하고 러시아의 실체를 깨달은 지도자였다.
러시아의 기원은 13세기부터 융성하기 시작한 모스크바 대공국이었다. 둘레의 다른 공국들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대공국은 몽골 제국의 일부인 킵차크한국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의 공국들은 공(prince)이 다스리는 사회로 백성들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체제였다.
카퍼레이드에서 색종이가 흩날리는 가운데 이승만이 모자를 벗어 군중에게 인사하는 모습. /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몽골 제국이 약해지자, 모스크바 대공국은 점차 흥기해서 러시아의 맹주가 되었고 끝내 유라시아의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안으로 압제적이고 밖으로 팽창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1896년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빠르게 커졌다. 러시아는 그런 영향력을 갖가지 이권들을 얻는 데에만 썼고 조선에서 막 시작된 개혁엔 적대적이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이승만은 안으로는 압제적이고 밖으로는 탐욕스러운 러시아의 전통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 세대 넘게 지난 1933년에 이승만은 협력적 관계를 맺으려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찾았다.
국적이 없었으므로, 그는 중국 대사관의 도움을 얻어 천신만고 끝에 모스크바에 닿았다. 그러나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는, 약속과 달리, 접견을 거부했다. 당시 러시아는 만주의 동청철도(東淸鐵道)를 중국에 돌려주지 않고 일본에 매각하려 했는데, 그 일로 일본 협상단이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었다. 일본의 비위를 맞추느라, 러시아는 이승만을 추방한 것이었다.
이 씁쓸한 경험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본질에 관해 깊이 깨달았다.
이어 1930년대 중엽에 기괴하고 음산한 ‘모스크바 재판’이 열렸다. 스탈린은 정적들을 숙청했을 뿐 아니라 고문과 위협으로 그들의 의지를 꺾어서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연출된 재판들’을 세계에 선보였다.
이 재판들은 헝가리 작가 아서 케스틀러의 위대한 정치 소설 ‘일식’에 생생하게 형상화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현대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의 중세적 체제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체주의 체제가 덧씌워진 사회임을 이승만은 통찰했다. 이런 통찰이 그의 큰 업적들 가운데 아마도 으뜸일 ‘얄타 협정의 비밀 협약’ 폭로를 가능하게 했다.
우연히 입수한 문서 하나로 그는 스탈린이 얄타 회담에서 꾸민 음모를 꿰뚫어 본 것이었다. 덕분에 한반도는 조선 사람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통째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병합되는 운명에서 벗어났다.
러시아의 본질에 관한 이승만의 통찰을 미국 지도자들은 1940년대 중엽에야 비로소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자, 러시아는 갑자기 서방에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당혹한 미국 국무부는 모스크바 주재 부대사인 조지 케넌에게 이런 변화에 대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1946년 2월에 워싱턴에 보낸 ‘긴 전보(Long Telegram)’에서, 케넌은 러시아의 비타협적 팽창주의는 모스크바 대공국 시기부터 이어진 전통에 바탕을 두었고 공산주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고 분석했다.
이승만과 케넌의 견해는 근년의 러시아 역사의 지지를 받는다. 1990년대 초엽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스스로 무너졌다.
그 잔해에서 여러 공화국들이 독립했는데, 주된 상속자는 러시아 공화국이었다. 이들 공화국은 모두 소비에트 러시아의 명령경제를 버리고 시장경제를 택했다. 그렇게 소비에트 체제가 벗겨졌어도, 러시아는 여전히 안으로는 압제적이고 밖으로는 팽창적이다. 러시아의 가장 근본적 지층인 제정 러시아의 중세적 전통이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10년 전에 러시아의 크리미아 침공으로 시작되어 아직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제 러시아는 쇠퇴하는 나라가 되었다. 대신 소비에트 러시아의 전성기에 스탈린이 세운 위성 국가들인 북한과 중국이 세계의 자유주의 질서를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이승만의 삶은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무슨 교훈을 보여주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들려주는가?”
대한민국의 핵심적 특질은, 즉 정체성은, 인류 역사가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다.
우리는 1945년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기 시작했고
1948년 이후엔 스스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꾸려왔다.
반면에, 북한과 중국의 시민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러시아의 경험은 교훈적이다. 설령 북한과 중국에서 전체주의 체제가 무너지더라도,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중세적 전통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착을 어렵게 하고 팽창적 태도를 지니도록 만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정체성의 핵심인 자유민주주의를 외부의 지속적 위협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코와코프스키의 말대로,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진정한 교훈이다.
이승만의 삶에서 배우는 교훈들---
여기서 물음이 나온다. “우리 모두 자유민주주의를 잘 아는데, 왜 굳이 이승만의 삶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살펴야 하는가?” 이 자연스러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주의는 나름으로 독특한 역사를 지녔고 그 역사의 관성에 따라 진화하리라는 사정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자라온 과정을 살펴야, 앞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대비할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 과제인 북한 동포들도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도록 하는 일에선 특히 그러하다.
6·25 전쟁에서 나온 감격적 장면들 가운데 하나는 1950년 10월에 이 대통령이 평양을 찾아 시민들에게 연설한 일이다.
그때 그는 북한을 찾기 위해 미군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38선을 넘어 먼저 진격한 것이 한국군이고
북한군과 치열하게 싸워 평양에 먼저 입성한 것도 한국군이었지만,
미국은 북한에 미군 군정을 펴겠다고 고집했다.
북한과 한국은 별개의 국가들이며,
국제연합군이 점령한 북한은 국제연합을 대표한 미군이 군정을 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앞으로 북한 동포들도 자유민주주의의 혜택을 받도록 하겠다는 우리의 간절한 희망이 만날 엄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북한의 압제적 체제가 무너져도, 중국만이 아니라 국제연합이나 미국도 남한과 북한은 별개의 국가라는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사례는 한반도를 가로지른 38선·휴전선과 대만 해협이 지정학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사정이다.
1949년에 ‘국공내전’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승리로 끝나고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밀려나면서,
동북아시아에선
대만해협으로부터 한반도의 38선·휴전선을 거쳐 사할린과 홋카이도 사이의 소야(宗谷)해협으로 이어지는 선을 경계로
북쪽엔 중국, 북한, 러시아의 전체주의 세력이 자리 잡고
남쪽엔 중화민국, 한국, 일본의 자유주의 세력이 자리 잡았다.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은 군대를 파견해서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고심 끝에 그 고마운 제안을 사양했다. 중화민국의 참전은 곧바로 중공군의 개입을 부를 터였다.
그처럼 조심스러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공군은 북한군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했다.
이 일화는 대만 해협과 한반도의 38선·휴전선이 처음부터 연결되었음을 일깨워준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기로 결정하면, 한반도는 다시 전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실제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대만 해협-휴전선-소야 해협으로 이어진 대치선의
북쪽 전체주의 세 나라는 모두 핵무기를 지녔다.
남쪽 자유주의 세 나라는 모두 핵무기가 없다.
지금 핵탄두 보유에서 러시아(5889기), 중국 (410기), 북한(30기)의 합계는 미국(5224기)보다 상당히 우세하다. 그리고 중국은 핵무기를 빠르게 늘리고 있다.
사정이 그렇게 다급한데도, 미국은 여전히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막는다.
북한군이 많은 전차를 보유한 것을 알면서도
한국군에 대전차 무기조차 제공하지 않고
주한미군이 철수한 1949년의 상황과 아주 흡사하다.
1952년에 휴전에 반대하면서, 이 대통령은 ‘지금 휴전하면, 지쳐서 먼저 휴전 제의를 한 공산군이 기운을 차려서 다시 공격해올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지적한 상황이 그대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앞날에 맞을 상황을 예상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서, 이승만의 삶은 소중한 교훈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바로 거기에 우리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기리는 일을 넘어 그의 삶을 진지하게 공부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다.
연재를 마치며---
그동안 졸고를 읽어 주신 독자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승만 오디세이’를 통해 이승만을 보다 잘 알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이승만을 미화했다는 평가도 들었습니다.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위대한 인물의 경우, 실책이나 허물도 궁극적으로는 중요한 업적을 이룬 요소들이 됩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이승만이 너무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정 때문에, 그의 인품과 업적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찬사로 느껴질 터입니다.
졸작 ‘물로 씌어진 이름’이 나온 뒤,
‘왜 그렇게 이승만에 매달렸는가?”라는 물음도 자주 들었습니다.
길 수밖에 없는 답변을 줄이면,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썼습니다.”
이승만은 우리 문단에선 ‘고압선’입니다. 만지면, 어려운 처지가 됩니다.
그래서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은 이승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모두 이순신이나 안중근이나 남로당처럼 안전한 주제들을 다룹니다.
거의 스무 해 전에 남한 작가들이 단체로 북한에 가서 북한 작가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들은 북한 사람들이 짜 놓은 각본대로 움직이면서 북한의 선전대로 하면 당장 평화 통일이 될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북한에 무슨 작가가 있나? 선전선동 요원들뿐이지.
만일 북한에 진정한 작가가 있다면, 그는 아오지 탄광이나 요덕 수용소에 있을 것이다.”
그 뒤로 저는 문단의 아웃사이더가 되었습니다.
친했던 문인들과도 서먹해졌습니다.
덕분에 저는 문단의 기류에 마음 안 쓰고 이승만을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을 썼습니다.
짧은 글로 이승만의 업적을 살피다 보니,
중세 사회에서 태어나 현대 사회에 자연스럽게 적응한 그의 신비스러운 면모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졸고가 계기가 되어 독자들께서 보다 충실한 글들을 찾아 나선다면, 저로선 보람이겠습니다.
=====================
"물로 씌어진 이름" 제1부 광복 세트
[ 전5권 ]
1.책 속으로
이승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드디어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네요. 파피, 아무도 당신 얘기를 믿지 않더니, 끝내 기습을 당했네요.”
그녀(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이 『일본내막기』에서 한 예언을, 즉 일본이 언젠가는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경고를 얘기한 것이었다.
---「1권 제3장 선전포고」중에서
스탈린은 일본이 패망한 뒤 동아시아의 질서를 새로 마련하는 일에선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과 관련해선, 스탈린은 “한국인들은 아직 독립된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40년가량 후견(tutelage) 아래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2권 제14장 애실런드 한국승인대회」중에서
1904년 11월 4일 오후 1시 이승만은 용산에서 기선을 탔다. 그의 가족이 제물포까지 배웅했다. 이튿날 오후 3시 이승만은 제물포에서 여객선 오하이오호를 타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의 트렁크 속엔 미국인 선교사들이 써 준 소개장 19통과 함께 민영환과 한규설이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의원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3권 제17장 국치일 행사」중에서
아우슈비츠는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암흑의 기념비다. 인간 본성의 어느 깊은 구석 병든 지층에서 우러나와서 문득 하늘이 컴컴해지도록 솟구친 검은 분수다. 인류 역사가 아무리 오래 나아가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죄악의 이정표다. 그 앞에 서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는가? … “신은 촛불을 끄려 하고, 나는 그가 잠시 한눈 판 틈을 타서 촛불을 지키려 한다. 촛불이 껌벅거리도록, 비록 신이 바라는 것보다 그저 조금 오래일지라도”(한나 크랄).
---「4권 제20장 아우슈비츠」중에서
베노나 사업의 암호 해독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해독한 암호 전문들의 내용에 경악했다. 그 전문들은 뉴욕의 러시아 영사관과 모스크바의 외무부 사이에 오간 것이 아니라, 뉴욕의 러시아 비밀요원들과 모스크바의 NKVD 외국첩보국장 파벨 피틴(Pavel M. Fitin) 중장 사이에 오간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러시아 정보기관들이 미국 정부 깊숙이 첩자들을 심었고 엄청난 기밀들을 빼내 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5권 제21장 얄타」중에서
‘아, 작가가 쓰려고 했던 것은 우남 이승만의 고초와 고뇌가 아니라, 우남으로 하여금 그런 고초와 고뇌를 하게 만든 그 시대의 역사였구나!’ 작가는 한 인간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민족 지도자로서 우남 이승만이라는 인간보다는 그 시대가 얼마나 엄혹한 시대였는지, 이승만이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환경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미 망해 버린 이름도 없는 약소국의 망명객이 짊어져야 했던 ‘시대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를 말하고 싶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5권 해설: 이승만과 그의 시대 (배진영)」중에서
2014년 간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집필에 들어간 『물로 씌어진 이름』은 지식인 작가 복거일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쓰인 역작이다. 『비명을 찾아서』에서 이미 선보인 역사의식, 세계사적 안목, 냉철한 현실 인식, 인간을 향한 애정 등이 마치 큐빅처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물로 씌어진 이름』이라는 거작에서 하나가 되어 표현된 것이다. 문학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런 거대한 세계사적 질문을 던진 작품을 나는 근래에 보지 못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2. 줄거리
식민지 조선의 국가 승인을 위하여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펄하버(진주만)의 미 태평양함대를 기습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바로 몇 달 전 이승만이 『일본내막기』에서 예언한 대로였다. 고국을 떠난 지 어언 37년, 어느덧 66세가 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임시정부가 연합국들로부터 정식 정부로 승인받게 하기 위한 외교 활동에 나선다.
1914년 이승만이 고국을 떠나고 5년 후, 조선에서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생긴 데 이어 상해(상하이)에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고 이승만은 그 수반이 된다. 그사이 러시아에는 세계 최초의 공산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 정권이 탄생한다. 3·1독립운동 당시 세계는 1차대전 전후 수습이 한창이었고, 이승만의 프린스턴대 은사였던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조선을 포함한 약소민족에게 희망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은 요원하고,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만주 침공을 준비한다. 상해임시정부에 김구가 합류하고, 이봉창과 윤봉길의 잇따른 의거를 주도한다. 그러는 사이 독립운동의 제1세대는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젊은 세대만이 희망이 된다. 8년 전인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는 이승만의 외교 데뷔 무대였다. 세계정세를 꿰뚫어본 이승만은 부질없는 무장투쟁보다 강대국들의 역학관계를 이용하는 외교 독립 노선을 추구했으나 번번이 좌절하는 가운데, 일본의 펄 하버 기습이 일어난 것이었다. 제네바 총회가 이승만의 이름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렸으나, 그에게는 개인적인 행운도 있었으니….
〈제2권〉
조선에 부는 변화의 바람
1942~43년. 대서양의 동쪽에서는 독일군이, 태평양 일원과 중국대륙에서는 일본군이 승승장구하며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다. 그러다 태평양에서는 미드웨이와 과덜커낼 전역(戰役), 유럽대륙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연합국이 승기를 잡는다. 조선이 어서 국가로서 승인받고 당당하게 연합국의 일원이 되게 하려는 이승만의 노력은 그러나 번번이 좌절한다. 미·영·러·중 연합국이 주도하고 26개국이 서명한 「연합국 선언」에도 대한민국은 참여가 거절되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한인자유대회’를 열어 한국인들의 단합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온 세계에 과시한다. 사반세기 전 이승만이 떠나온 조선은 중세 사회였다. 그러나 어느새 식민지 조선은 서서히 근대사회로 탈바꿈해 가고 있었으니….
〈제3권〉
조선의 선각자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의 세계 정복 야욕은 날로 커져 갔다. 격변의 맹아를 품은 19세기에 조선과 주변은 메이지유신, 병인양요, 태평천국의 난, 동학란, 청일전쟁을 차례로 겪었고, 20세기 들어서는 러일전쟁, 국권 침탈과 3·1독립운동, 러시아 혁명과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신음했다. 서양은 과학과 기술을 앞세워 다른 문명을 정복해 나갔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단숨에 근대국가로 바뀌고, 대륙과 세계를 향한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는 문호를 닫고, 개화파 제거를 위해 청나라를 끌어들이고, 동학란 진압에 일본군을 끌어들여 청일전쟁을 자초하고, 급기야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난할 정도로 무능하고 세계정세에 어두웠다. 그러나 조선에도 선각자들은 있었으니, 멀리는 개화파, 가까이는 이승만의 정신적 스승 서재필, 그리고 이승만이 있었다. ‘만민공동회의 스타’ 이승만은 종신형을 받고 한성감옥에 수감되는데….
〈제4권〉
스탈린의 수중에 떨어질 뻔한 조선
1944~45년. 히틀러와 일본의 몰락이 첨차 가시화하면서, 전후(戰後) 처리를 위해 연합국 수뇌들이 잇따라 회합한다. 얄타에 모인 세 지도자, 루스벨트와 처칠과 스탈린의 동상이몽은 한반도를 스탈린의 러시아 수중에 넘겨주는 비밀협약을 낳는다. 얄타 비밀협약의 배경에는 신의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강대국들의 부도덕함이 있었다. 자유 진영은 동유럽을 러시아에 넘겨준 데 이어 동아시아까지 스탈린의 수중에 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국보다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암약하는 미국인 첩자들이 있었다. 이국 땅 러시아의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인들의 환상은 ‘붉은 십년대’인 1930년대에 극에 달했다.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조선의 독립을 훼방한 대표적인 인물은 앨저 히스다. 이승만의 외교 독립을 번번이 좌절시킨 배후에 앨저 히스, 그리고 미 백악관과 국무부를 장악한 러시아 첩자들이 있었다. 얄타 회담 두 달 만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한다. 한국을 돕는 고마운 미국인들, 특히 에밀 고브로의 도움을 받아 이승만은 마침내 얄타 비밀협약의 존재를 온 세상에 폭로하기로 결심하는데….
〈제5권〉
자유세계의 파수꾼들
백악관과 국무부를 장악한 러시아의 첩자들은 중국과 한반도를 공산 전체주의 세력에 넘기는 데 눈이 멀고, 마침내 중국대륙이 1949년에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진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을 발표함으로써, 대한민국과 대만을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깊어 가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미국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무지하거나 무기력했던 시민들을 일깨운다. 의원들의 조직적인 방해와 매카시의 급서(急逝)로 ‘매카시즘’은 오늘날 저주받은 이름처럼 되었지만, 러시아가 미 국무부에 첩자들을 심었고 이들이 엄청난 비밀을 빼갔다는 매카시의 주장은 사실이었음이 후에 드러난다. 그러나 기어이 한국에서는 기어이 6·25 남침이 일어난다. 1945년 10월 16일, 거의 41년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이승만이 돌아온다. 그는 앞으로 5년간 자신과 대한민국과 세계를 휩쓸 격랑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3.출판사 리뷰
청동에 새길 이름을 물로 쓴 국민
건국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일대기를 문학으로 형상화한 『물로 씌어진 이름』 3부작 중 제1부 ‘광복’ 全5권(백년동안 刊, 2023)이 출판되었다.
이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의 이름이 실제로 물로 씌어진 사람의 이야기다. 이름이 물로 씌어졌다면, 그는 평범하게 산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거대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으리라. _제1장 워싱턴의 일요일, 39쪽
全 5권에 소설 본문만 2,500쪽이 훌쩍 넘는 제1부 ‘광복’의 ‘현재’는 일본이 하와이의 펄하버(진주만)을 기습공격한 1941년 12월 7일부터 망명객 이승만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1945년 10월 16일까지 만 4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다.
각권에 30장 안팎씩 들어가는 삽화(조이스 진 그림)를 따로 권두에도 한데 모아, 해당 권의 길잡이 겸 요약본으로 삼았다. 작가 자신의 해제와 함께 〈월간조선〉 편집장 배진영과 문학평론가 진형준(前 한국문학번역원장)의 해설을 제5권 말미에 실었다.
망한 나라의 망명객이 져야 했던 무거운 짐
소설은 알려진(그리고 악의적으로 묻히거나 왜곡된) 이승만의 성취 외에, 비교적 덜 조명되었던 사건들을 파헤치거나 재조명한 점에서 문제작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얄타 비밀협약 폭로’, 백악관과 미 정·관계 곳곳에 침투한 소련의 하수인들, 그리고 ‘매카시즘’으로 악명 높은 존 매카시의 재평가가 그렇다.
얄타 비밀협약이란,
“에밀, 어차피 정의롭지 못한 ‘비밀협약’은 공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의 독이 제거됩니다. 그것의 존재를 폭로하면,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반응할 수밖에 없어요. 만일 그들이 ‘비밀협약’이 있다고 인정하면, 우리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 나서도 세상이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없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그것이 집행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소비에트가 몰래 한국을 장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_제21장 얄타, 제4권 293쪽
스탈린의 궁극적 야망은 제정 러시아의 부활이라는 의미에서 작가는 소설 내내 제정 러시아?소련?현 러시아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체를 일관하여 ‘러시아’로 부른다. 냉전 시절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백악관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기관에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암약하는 미국인 첩자들이 다수 있었고, 심지어 정치와 외교와 전쟁을 이끈 프랭클린과 엘리너 루스벨트 부부, 마셜 원수-국방장관 같은 파워 엘리트들까지 러시아에 포섭당했거나 끌려다녔다고 작가는 단언한다. 그리고 망한 나라의 외교관 이승만이 미 백악관과 국무부의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고.
그러나 조지프 매카시가 있었다! 오늘날 매카시즘은 저주받은 이름이지만, 매카시야말로 러시아 첩자들의 소굴인 미국의 심장부에서 자유세계의 방패와 창이 되어 준 고마운 인물이며 그 위업은 전체주의 러시아와 중국이 마각을 드러내는 지금 더욱 빛난다고 작가는 재평가한다.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고비를 맞았던 1950년 초에 매카시는 혼자 힘으로 도도하던 공산주의의 물살을 막고 위태롭던 남한의 대한민국과 대만의 중화민국을 지켰다. … 비록 지금 남한과 대만에 그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도록 했다는 사실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더라도 위업이다. … 중국이 남중국해를 자신의 내해로 만드는 데 진력해서 전쟁 위험이 부쩍 커진 지금, 매카시의 공헌은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_제21장 얄타, 4권 146쪽
이승만의 공과(功過)는 ‘역사를 보는 창’
이후의 삼부작 얼개는 작가가 손수 쓴 해제 ‘역사를 보는 창’에서 엿볼 수 있다. 자유민주 대한민국 건국과 6·25의 시련 속 이승만의 빛나는 성취, 그리고 작가가 ‘우남의 허물’이라 단언하는 사사오입 개헌부터 1960년의 ‘파국을 막은’ 하야까지다. 그러나 소설의 스케일은 20세기 한반도에 머물지 않고 세계로, 약 2세기간의 전사(前史)로 뻗어나간다. 이승만의 삶 자체가 역사를 보는 창인 이유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려면 우남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으로 충분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 없이는 지금 우리 사회를 만들어 낸 역사의 복잡한 흐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뜻에서 우리에게 우남은 역사를 보는 창이다. 그리고 그 창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 우남을 세워 놓아야 비로소 우리는 우남을 이해할 수 있다. 졸작 『물로 씌어진 이름』은 우남이라는 창을, 이제는 세월의 먼지가 두껍게 앉은 창을, 조심스럽게 닦아서 조금이라도 맑게 하려는 노력이다. _작가 해제: 역사를 보는 창, 제5권 530쪽)
문학평론가 진형준(前 한국문학번역원장)은 『물로 씌어진 이름』과 비슷한 시기를 다루면서 마찬가지로 ‘역사와 인간, 지성과 예술’이라는 인류사적 스케일의 묵직한 물음을 담은 문학으로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꼽는다. 만과 헤세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도 읽을만한 『물로 씌어진 이름』의 복거일이야말로 노벨 문학상감이 아니냐고 그는 반문한다. 벌써 10년째 투병 중인 작가가 입버릇처럼 “유작이 될 것”이라 말하는 『물로 씌어진 이름』은 2015년 말부터 〈월간중앙〉에 연재를 시작했고, 2023년까지 제1부 ‘광복’을 끝내고 제2부 ‘건국’을 막 시작한 참이다.
4. 작가 복거일 (BOK,KOH-ILL,卜鉅一)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작가 복거일은 책이 좋아 읽다보니 어느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젊은 날, 넉넉한 보수를 주던 은행을 그만둔 이유도 오롯이 책 읽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어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