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2인자’, ‘풍운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 측 관계자는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르고 충남 부여의 가족묘에 안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영결식은 27일 수요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 영결식장, 발인은 오전 9시.
JP에게 1961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당시 JP는 서울대 사범대를 거쳐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한 35살의 육군 중령이었다.
그 해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쿠데타에 가담해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그의 인생은 크게 뒤바뀐다.
이후 JP는 한국 정치사에서 때로는 화려한 2인자로, 때로는 불운의 정치인으로 숱한 정치 역정을 겪었다.
3공화국 초대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으로 ‘권력 2인자’에 오른 그는 1963년 국회에 처음 진출했다.
같은 해 집권 민주공화당의 의장까지 맡았으나 박 전 대통령과 혁명동기들의 견제가 만만찮았다.
JP는 1964년 ‘6·3사태’의 희생양이 돼 당의장직을 사임하고 외유(外遊)길에 올랐다.
당시 섭섭한 심경을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로 애써 감췄다.
JP는 1967년 7대 국회로 재입성에 성공했다.
4년 뒤에는 ‘1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는 국무총리로
다시 2인자에 화려하게 컴백해 만 4년6개월 동안 직을 수행했다.
1979년 10·26 직후 공화당 총재를 맡았지만 신군부에 의해 ‘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 찍혀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JP는 김대중(DJ) 전 대통령,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함께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11, 12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그가 정치활동을 재개한 것은 민주화 요구가 거셌던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하면서다.
이어 1988년 13대 총선 때 신민주공화당으로 충청권을 석권하며 정치 전면에 복귀했다.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 민주당 총재이던 YS와 3당 합당에 참여해 1992년 대선에서 YS 당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초 YS 진영으로부터 “정치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다시 위기를 맞게 되자 같은 해 3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 창당으로 정면승부를 건다.
JP의 자민련은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을 휩쓸고,
96년 15대 총선에서도 충청권에서 24석을 포함해 총 50석을 얻으면서 위력을 발휘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P 연합’으로 공동정권을 탄생시켜 김대중 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의석수는 17석으로 쪼그라들었다.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한 JP에 대해
DJ는 민주당 의원 4명을 자민련으로 꿔주는 유례없는 ‘의원 임대’ 파동까지 빚으며 공조 유지를 시도하기도 했다.
DJ와의 결별은 2001년 ‘햇볕정책 전도사인’인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하면서다.
JP가 DJ와의 연대 시 담보로 요구한 것은 내각제였다.
내각제 개헌이 무산된 뒤 DJP 연합이 흔들리던 와중에 JP가 해임건의안을 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손을 들어주며 공동정권은 결국 파경에 이르렀다.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건 노무현 대선후보와 민주당에 충청권을 대거 잠식당했다.
2004년 17대 총선 때는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며 재기를 향한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총선 직전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추진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뒤늦게 가담했다가 역풍을 맞아 4석으로 쪼그라든다.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조차 낙선하면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총선 패배 직후인 2004년 4월 19일
그는 “패전의 장수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국민의 선택은 조건 없이 수용해야 한다”며
총재직 사퇴 및 정계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5·16쿠데타로 한국 정치사에 등장한 그가 43년간의 정치인생을 접은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4·19혁명 44주년 기념일이었다.
“유권자는
사육사가 잠시 한 눈을 팔면 물어뜯는 맹수와 같다”고 말했다.
17대 총선은 ‘보수 원조’를 자임해온 JP가
변화된 유권자들의 성난 민심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일깨워준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 마포당사에서 당직자들에게
“43년간 정계에 몸담아 왔고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 됐다”며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 명예고문이 된 JP는
“이명박 후보야말로 우리나라를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이끌고
개인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 적임자”라며 지원 유세를 했지만,
대선 이후엔 약속대로 다시 야인(野人)으로 돌아갔다.
그간 얻은 별명도 많다.
‘부패원조’는 5·16쿠데타 이후 공화당 창당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4대 의혹사건’을 시작으로
“신악(5·16세력)이 구악(이승만 정권)을 뺨친다”는 평가를 받으며 생겼고,
‘정치9단’은 노회한 정치리더인 3김(DJ·YS·JP) 모두에게 붙은 수식어였다.
‘낭만의 정객’은 수세에 몰릴 때 화려한 수사로 위기를 넘겨온 그를 잘 표현한다.
JP는 한학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고사성어를 잘 활용했다.
공주중(5년제) 시절에는 밤새 책 한 권씩 읽고
다 못 마치면 학교수업도 가지 않는다는 ‘일야일권 독파주의’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저서, 세계문학전집 등을 모두 읽었다.
3만 권의 책을 소장했다는 ‘독서광’
DJ보다 장서가 많다고 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좌우명대로
정치 인생의 갈림길마다 물 흐르듯 유연하게 고비를 넘겼던 JP.
그는 2017년 19대 대선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인생을 오래 유지했지만
‘3김 시대’로 상징되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다른 거목인 YS, DJ과 달리 1인자가 되지 못하고
‘영원한 2인자’요, ‘킹 메이커’에 머물렀다.
JP는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이 남아있다’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를 즐겨 인용했다.
의미를 물으면
“잠들기 전이란,
죽기 전이나 정계를 떠나기 전으로 해석하면 된다.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나 남은 나무조각”이라고 말했다.
JP는 명분보다 실리를 좇은 정치인으로 평가받지만
그가 꿈꾼 인생은 “완전 연소돼 재가 되는” 불같은 삶이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NewsStand/3/all/20180623/90718756/1#csidx456dc5f7788295fbc1805e17e150d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