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각하는 여유/4.역사 이야기

ebs 역사특강/3강 광복.분단.건국

언제나오복의향기 2014. 2. 2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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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little boy와 fat man이 일본 제국주의를 침몰시켰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발의 원자폭탄은 일본 군국주의의 마지막 광기를 잠재웠고, 결국 일왕 히로히토는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일본의 항복과 함께 한반도는 35년 만에 광복을 되찾았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이 아닌 다른 나라의 힘으로 얻은 것이기에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세계 질서는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의 기존 열강은 몰락하고 대신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소련 두 세력이 대립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동북아시아에서 두 세력의 대립은 불행히도 한반도를 무대로 삼게 되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패전국 일본을 분할하는 대신 한반도를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 분할점령할 것을 제의했다. 소련은 향후 한반도 북쪽과 일본 홋카이도를 교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이를 수용한다. 우리 민족을 지금까지 갈라놓게 된 38선은 바로 이때 두 강대국의 편의에 의해 생기게 된 것이다.
민족의 독립과 민주국가 수립을 염원하고 있던 한민족의 분노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통과되자 거센 반탁 운동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남한의 김구와 이승만은 초반에는 함께 반소, 반탁, 반공 운동을 전개했지만 1946년 6월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노선을 바꾼다. 당시 동부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이 되어가는 국제 정세를 보며 남한에만이라도 자유민주정부가 들어서야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김구의 생각은 달랐다. 김구는 남북한의 통일만이 민족의 살 길이라고 믿었으며 이에 따라 1948년 4월 통일정부를 구상하기 위해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다. 하지만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남한에서는 5.10 총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북한의 김일성 역시 단독 정부 수립을 이미 결정한 상태였다. 김구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결국 1948년 8월 남한에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북한에는 한 달 뒤인 9월 김일성을 주석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선다.
한 국토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누가 한반도의 정통성을 잇는 정부인가를 따지는 인정투쟁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이를 위해 1948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UN 3차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이 중 주목할 것은 당시 UN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바티칸의 지원을 얻기 위해 가톨릭 신도이자 외교통이었던 장면을 한국대표단 수석대표이자 바티칸 대통령 특사로 임명했다는 점이다. 장면은 이승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티칸을 찾아 교황 비오 12세의 지원을 얻어낸 것은 물론, 당시 대한민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영연방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의 대표들을 상대로 부단한 설득작업을 펼친다.
한국대표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마침내 UN 3차 총회 회기 마지막 날이었던 1948년 12월 12일 UN은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한다.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력으로 독립을 얻지 못했기에 겪어야 했던 분단의 아픔과 민족의 분열, 그 과정에서 벌어진 곳곳의 유혈사태는 여전히 우리 근현대사의 상처로 남아 있다.
광복부터 분단,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며, 우리가 오늘날 이 시기로부터 얻어야 하는 교훈과 깨달음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