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수행 주제

부처님의 수행법으로 팔정도, 무상고 무아에 대해

언제나오복의향기 2014. 6. 24. 21:59

삼법인(무상,고,무아)과 사성제-쉐우민 심념처 위빠사나

2014/05/0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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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법인

1. 삼법인과 사성제 

수행자 : 위빠사나 수행에서 삼법인과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행하는 선상에서 삼법인과 사성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사야도 : 삼법인과 사성제는 자기 지혜에 따라 이해하게 됩니다. 어때야 한다고 이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상>

일어나는 그것은 상관은 없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항상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이해되었을 때 그것을 무상이라고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자체를 보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는‘일어나고 사라지진다. 생멸한다.’말을 합니다. 사람마다 말하는 게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변한다.’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단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자기 지혜에 따라 이해하지만, 어떻게 내가 이해하느냐?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것을 보는 것보다 일어남의 특성, 사라짐의 특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뜨거운 장소에 있다가 시원한 장소에 갔습니다. 뜨거움이 사라지고 시원함이 생겼습니다. 뜨거움의 사라짐과 시원함의 일어남 중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씩 하나씩 집중해서 보는 사람은 뜨거움의 사라짐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지켜보는 사람은 뜨거움의 사라짐과 동시에 시원함이 일어남을 압니다. 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혜의 힘이 좋은 사람은 시야가 넓으니까 그냥 한꺼번에 다 봅니다. 이것이 사라지면서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같이 봅니다. 만약에 뜨겁고 시원한 것, 그것을 없애버리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일어나는 성질, 사라지는 성질 그것만 있습니다. 일어나고 난 뒤에 사라지는 것,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을 이해하고 사라지는 것을 이해합니다. 자기의 지혜에 따라서 이해하는 것이 다릅니다. 보통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은 일어나고 난 뒤에 사라진다고 이렇게 이해합니다. 그것은 빤냣띠 밖에 안 됩니다. 무상을 이해하는 힘이 약한 것입니다.

 

빠라맛타는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생긴 사람만이 지혜가 작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에 대해서는‘어떻게 봐야 한다.’이렇게 딱 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것을 내가 정말 이해했으면 그 지혜가 어떤 것을 볼 때마다 계속 작용을 합니다. 뭔가를 볼 때 마다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혜의 힘이 좋은 사람은 일어나고 사라진 뒤에 항상 하지 않다고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그 순간에 딱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지혜가 자꾸 생기게끔 허락을 해야 합니다. 한번 지혜가 생긴 것 하고 그 다음에 지혜가 생긴 것 하고는 다릅니다.

사띠와 지혜 이런 것들이 항상 합니까? 항상 하지 않습니까? 항상 하지 않으면 뭐 때문에 수행을 하려고 합니까? 일어나는 마음은 항상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잠재력은 있습니다. 만약에 다른 종교인이 와서 물으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 해주겠습니까?

‘항상 하지 않다고 하면 그러면 뭐 하러 수행을 합니까?’이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계속 변하면서 항상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잠재력은 계속 변화하면서 힘이 더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될 수 있고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지 않다는 그 말 한마디로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항상 하지 않은가?

그냥 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의 원인에 의해서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무상 하나 가지고는 안 됩니다. 무상, 고, 무아를 한꺼번에 이해했을 때에 조금 전에 말한 그런 답이 나오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것 한 가지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는 무아의 지혜가 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의 지혜가 많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미 알았다.’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지금 이 정도로 내가 안다.’이렇게는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을 절대 막지 마십시오. 아는 것이 더 이상 알아지지 않도록 막지 마십시오.

지금처럼 계속 1년 동안 수행해 나간다면 나의 지혜가 얼마나 더 증장 되겠습니까? 지금은 내가 제법 많이 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년 동안 꾸준히 수행을 한 후 지금 내가 아는 것이 어떻게 생각이 되겠습니까? ‘지금 내가 알았지 예전에는 아무것도 몰랐든 것이다.’이렇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려고 막 억지로 애를 쓰지 마십시오. 그냥 이해 할 수 있는 지혜, 이해하는 지혜가 나도록 그렇게 봐야 됩니다.

 

<고>

둑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보통 그것을 번역 하면 괴로움, 고통, 그렇게 말을 합니다. 실제로 둑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가지가지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둑카는 괴로운 그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둑카는 웨다나 둑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둑카는 … …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은 느낌의 둑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둑카라고 이해했을 때는 괴로움은 없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면 낄레사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집착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렇게 이해를(깨달음) 하면 그것을 벗어난다고 그렇게 느껴집니다.

지혜가 날 때마다 마음에 느낌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그러한 성질이 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벗어납니다. 그런 것은 정말로 깨달았을 때,‘지혜라는 것이 어떤 것이다.’라는 것을 정말로 깨달았을 때, 벗어나는 느낌이 있게 됩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모하로서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체험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해하는 지혜가 중요한 것입니다.

한 수행자가 전에 계속 생멸, 생멸 하는 것을 보게 되니까 거기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생멸, 생멸하는 것이 언제 끝날 것인가? 언제 멈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멸, 생멸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도사가 일어날 수도 있고 로바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벗어나고 싶다고 하면은 로바,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그만 낙심(도사)하게 될 것입니다.

왜 벗어나고 싶습니까? 지혜가 둑카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를 했습니다. ‘아! 이건 참 괴로운 것이다.’고 이해를 했습니다. 둑카를 조금 보기는 했지만 아직 지혜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둑카는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버리고 (로바, 도사로)딱 떨어지게끔 될 수가 있습니다. 지혜가 완전하지 못하니까 ‘괴로운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다.’라고 바라면서 안 되면 낙심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무아>

‘항상 하지 않다. 괴롭다.’ 이렇게 되고 나면은 ‘내가 없다.’는 것이 거기에 들어와야 됩니다. 모든 것이 원인, 결과에 따라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아는 지혜가 나와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 결과로 인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겠습니까? 내가 없는 데 벗어나야 한다는 그런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지혜가 완전히 채워져야 합니다. 한두 가지를 가지고는 안 됩니다. 내가 없다는 것도‘내가 없다. 나도, 중생도, 개인도 없다.’그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원인, 결과를 이해해야 합니다. 원인으로 인해서 이러한 결과가 된다는 사실 그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부처님 말씀 하신 것 중에 어느 곳이든지 항상 원인, 결과를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사제도 그것뿐입니다. 집착 때문에 둑카가 생기고 도제로 인해서 멸제가 생깁니다. 그런 것들을 다 이해를 해야만 완전해집니다.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내가 뭐가 됐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큰 부자가, 거부장자가 된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됐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해가지고 부자가 된 줄 모릅니다. 그 부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모릅니다. 그냥 물려받은 재산 가지고는 그렇게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말로 내가 깨달아서 이해한 사람은 괴로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인지 알아야 되고 무엇 때문인지도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도 알아야 되고 뭘 안하면 얻지 못하는가도 알아야 합니다.

지혜의 눈은 하나만이 아닙니다. 2.4.8…아주 많이 있습니다. 사제가 하나 끝나고 하나 이렇게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꺼번에 4가지가 보이는 게 아니라 한순간에 4가지를 다 알게 됩니다.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아무 원인과 결과를 알지 못하고서 무조건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어서 그게 참 어렵습니다. 노란색을 본다고 해서 그게 다 금이 아닙니다.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은 내가 그 가치에 맞았을 때 얻게 됩니다. 그 가치만큼 얻을 수 있는 원인이 갖추어졌을 때 됩니다. 그냥 보통 것이 아니라 진짜라야 됩니다. 사람들이 로바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까 로바가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2. 12연기와 삼법인 

 

수행자 : 사야도로부터 삼법인과 연기법에 대해 법문을 듣고 싶습니다.

 

사야도 : 12연기(緣起)는 쉽습니다. 김치를 보면 우선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서 먹게 되고 하는 과정이 모두 연기입니다. 12연기는 내가 현재 체험하는 것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12연기는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습니다. 12연기가 무엇에서 부터 시작합니까? 무명에서 시작합니다. 바르게 알지 못하니까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원하니까 하게 되고, 하니까 얻습니다. 얻으니까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니까 그것을 다시 얻고 싶어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돌아갑니다. 이런 법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다 있습니다. 단지 보이는 것만이 문제입니다.

큰사야도께서는 알지 못하면 윤회하고 알면 끊어진다고 하시며 연기를 설명하셨습니다.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처음 수행을 할 때는 사띠로써만 수행을 합니다. 오래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게 되면 지혜가 우선이 되어 앞에서 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윤회를 하지 않고 끊게 됩니다. 

 

무상, 고, 무아는 들어서 아는 것으로는 힘이 없습니다. 실제 체험을 통해 알아야 확실히 알게 됩니다. 무상, 고, 무아는 체험이 아닙니다. 깨닫는 지혜입니다.

 

둑카(苦)라고 하는 것은 느낌의 둑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제의 고를 의미합니다. 사마디가 좋은 상태에 있을 때‘아! 이것이 정말로 둑카로구나!’ 하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지혜입니다. 사람들이 둑카라고 하면 고통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어떤 수행자 한사람은 담마홀에서 고를 보고서 너무 괴로워서 ‘엉엉’ 울었습니다. 이것은 둑카의 의미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무아는‘내가 아니다. 내가 들어있지 않다.’라는 것으로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이해해야만 무아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에 의해 이러한 결과가 있을 뿐이지 거기에는 ‘나’라는 게 들어 있지 않다는 것,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무상에 대해 이해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것만을 가지고 무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사라지기 전에도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 사람들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생멸하는 것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정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일어나는 거기에서도 무상을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멸을 보면서도 무상의 지혜는 나지 않습니다. 생멸을 보면 내가 무상을 봤다고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마음에 로바가 생깁니다.

 

무상, 고, 무아를 이해하는 지혜가 있으면 기뻐하는 게 아니라 로바가 줄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집착이 줄어들게 됩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유로워집니다.

 

수행자 : 지금 법문 중에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났을 때 번뇌가 줄어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럼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도 번뇌가 소멸되는 게 아니고 계속 있다는 말씀입니까?

 

사야도 :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잠재된 번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 과의 지혜를 얻었을 때 잠재된 번뇌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수다원과를 얻었을 때는 수다원과를 얻었을 때 없어지는 그 낄레사만 없어집니다. 수다원과를 얻었을 경우 없어져야 하는 그 낄레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로바, 도사도 아주 큰 것은 없어집니다.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도사나 훔치고자 하는 로바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예 일어나질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듣기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본인이 직접 체험해서 알아야 맛이 있습니다. 말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는 맛이 없습니다. 지금 이런 것은 단지 들은 정보, 지식이 되게 하기 위해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3. 무상 

 

수행자 : 센터에서 보낸 3개월을 돌아보니까 많은 생각이 나지 않고 그냥 하루를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야도 : 하루를 지낸 것 같다면 그것은 좋습니다. 3개월을 어떻게 보여 줄 수 있겠습니까?

 

수행자 : 그러면서 모든 게 너무 무상하다는 생각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야도 : 어떻게 빠져들었습니까?

수행자 : 감정적으로 모든 게 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야도 : 생각을 그렇게 해서 그렇습니다.

 

수행자 : 제가 한국에 있을 때도 가끔씩 그렇게 무상함을 느끼고‘인생이라는 게 별게 없고 무의미하다.’이런 생각들을 했던 게 생각났습니다.

사야도 : 그것은 진짜 무상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법에 지혜가 미치지 못하고서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면 도사만 일어나게 됩니다. 만약에 무상하다고 생각을 해서 슬픔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도사입니다.

 

누가 슬퍼합니까? 항상 해지고 싶은 그 마음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항상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강하고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약하기 때문에 그래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는 마음이 아주 자유로워집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착함이 줄어들게 되니까 마음이 아주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슬퍼하는 마음도 없고 그런 마음과 관련된 마음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법에 대해서 심사숙고 할 때에 지혜가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거기에 대해서 자꾸 생각을 하다 보면 잘못하면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합니다.

 

수행자 :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내가 무상하다는 생각과 슬픈 느낌에 빠져서 사띠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야도 :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견해가 잘못되어서 그래서 슬퍼했습니다.‘항상 하지도 않고 괴롭고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그러면 좋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혜가 미치지 못한 조건에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낙심할 일만 남아 있습니다. 무상, 고, 무아는 지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지혜는 아무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이해했다고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고서 이해했다고 생각을 하면 복잡해집니다. 진짜 지혜가 있으면 내가 이해하지 못했으면 이해하지 못했다고 분명히 압니다. 로바가 아주 강한 사람들은 조금 이해한 것을 가지고 엄청 많이 이해했다고 생각 합니다.

 

4. 사라짐과 무상

 

수행자 : 저는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하면 보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몸의 통증이나 마음의 느낌을 알아차림 했을 때 사라진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궁금합니다.

 

사야도 : 사라지는 것은 통증이 있을 때도 그것을 도사(진심)로서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못마땅한 마음이나 없애고 싶은 마음으로서 그것을 계속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못견뎌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라지지 않는데 못견뎌하는 마음이 없을 때 사라집니다.

 

어떤 때는 아주 너무 애를 써서, 집중을 해서 볼 때에도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집중을 해서 봄으로서 사라지는 것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내가 힘을 들여서 보지 않아도 저절로 지가 일어났다가 지가 사라지는 것,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내가 봄으로서 사라졌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에 내가 봄으로서 사라졌다라고 하면 다 내가 봐서, 내가 보니까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지가 저절로 일어났다가 지가 저절로 사라졌다고 이해하면 거기서 무상을 이해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봄으로서 사라졌다고 하면 무상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그냥 보이는 대로 보기만 하면 됩니다. 생각도 내가 집중을 해서 보면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보이는 것에 대해서 집중을 하고 있으니까 그것에 알맞게 매치가 되질 않고 핀트가 오버되어 보이질 않게 됩니다. 보이질 않으니까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띠가 적당하게 있으면 보입니다. 보이는 것도 힘을 써서 보면 그만 오버가 되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안보이면 사라졌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중을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안 좋습니다. 집중을 하지 않고 지가 저절로 일어났다가 지가 저절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는 힘이 강해서 집중해서 보면 사라지고, 보면 사라지고 하니까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보면 사라지고, 보면 사라지고 하니까‘아! 내가 무상을 보았다’라고 생각 합니다.‘무상을 내가 보았다’이렇게 생각 합니다. 집중을 해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설사 무상하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무아는 되지 못합니다. 내가 무상을 봤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내 사띠가 아주 좋아서, 내 사마디가 아주 좋아서, 내가 보기만 하면 사라진다’라고 이렇게 생각 합니다. 무조건 사라지는 것을 본다고 해서 무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걸 모르니까 자꾸 사라지게 끔만 하려고 합니다. 찾아서도 사라지게 하려고 합니다.

 

수행자 :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일 뿐인데 그것을 보면 사라진다는 것은 유신견이 들어간다는 말씀인가요?

 

사야도 :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은 그렇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냥 단지 변한다, 다르다고 알면 됩니다. 보는 마음에 내가 없으면‘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게끔 됩니다. 지혜가 그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조건 사라지는 것을 봐야만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변하는 것을 봐도 되고, 다르다는 것을 봐도 됩니다. 그래도 무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물질의 무상

 

수행자 : 사야도 인터뷰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무상함조차 알기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마음이 물질을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사야도 : 수행을 하면 알 수 있습니다. 사띠가 있고 사마디가 있을 때 그것도 같이 생기게 됩니다. 물질을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합니다. 확실히 알지 못할 때는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고 그것만 있을 뿐, 실제로 무상함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냥 생멸하는 그것만을 보면서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 합니다. 지혜로 보았을 때, 보는 쪽에 지혜가 있고 정직해야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 : 그러면 물질의 무상함도 결국에는 마음의 무상함과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사야도 : 똑 같습니다.

6. 둑카와 행복

 

수행자 : 저는 사야도께서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집중수행에 참가 했었습니다. 그 후로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게 보여지는 세상은 먼지처럼 다 부셔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괴롭고 떠나고 싶고 울고 싶고…….  빨리 제가 이 수행의 최고목표를 달성하기 전에는 이런 것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야도 : 그렇다면 도사가 일어난 것입니다.‘고’라는 것에 대해서 지혜로서 ‘고’를 안 것이 아니고 도사로서‘고’를 안 것입니다.‘고’에 대해서 잘못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고’의 뜻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고’에 대해서 이해한 사람은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수행자 : 매일 흘린 것은 아닙니다.

사야도 : 한번을 흘리더라고 그것은 ‘고’에 대해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둑카라고 이해한 사람들은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자유로워집니다. 사람들이 수행을 왜 하냐고 물으면 편안하기 위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욕망으로서 행복한 것을 말합니다. 선정을 얻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도와 과를 얻어서 행복한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닙빠나를 얻어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욕망으로서 편안한 것 그것만 압니다. 사람들이 편안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로바로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둑카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뜻이 잘못되었습니다. 뜻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이해하면 거기에는 도사가 들어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이해하는 고통은 눈물 나는 고통을 압니다. 고통스러우니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지혜로서 둑카를 이해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괴롭다. 괴롭다’생각을 하면서 점점 더 마음이 괴로워 져서 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어서 도사의 극단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살도 하고 그럽니다. 지혜인 것처럼 하고서 도사 쪽으로 갑니다. 자기 자신은 그것을 지혜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도사입니다.

 

정말로 지혜가 나본 사람이라야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지혜가 낫을 때에 얼마나 좋은 줄은 나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생각으로서 만들어 내어 버립니다. 이것은‘무상이다. 이것은 무아다. 이것은 고다’이렇게 자신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차분하게 낄레사가 없이 볼 줄 알도록 만 하십시오. 낄레사가 없이 볼 줄 알게 되면 지혜가 스스로 그것을 판단합니다.

 

보는 마음이 청정해야만 지혜가 나게 됩니다. 지혜가 날 때는 내가 과거에 생각했든 것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반대라는 것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경지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그런 것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위빠사나 지혜를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아주 새로운 것, 특별한 것입니다.

 

7. 둑카

 

수행자: 좋지 않은 것은 모두 다 둑카[괴로움] 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낄레사는 다 둑카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사야도: 모든 낄레사는 다 웨다나(수.느낌] 둑카라고 하면 됩니다.

정말로 지혜로서 알게 되는 둑카는 괴로움, 행복함, 사마디, 삐띠등 무엇이든 다 괴로움(둑카)이라고 알게 됩니다.

 

8. 공과 무아

 

수행자: 공(空)과 무아(無我)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야도: 공(空)이면 무아(無我)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무아를 말하고 싶어서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게 되면서 ‘사람도 없고 중생도 없다.’라고 아는 것을 공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