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비싸거나 아주 싼 것만 잘 팔린다
[WEEKLY BIZ] 인플레이션이 부른 소비 양극화
김지섭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06.09 17:30
40여 년 만의 최고 수준의 인플레이션으로 가계의 생활비 부담이 커지면서 ‘소비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고소득과 보유 자산 가치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의 타격을 비켜 간 고소득층은 기존 소비 수준을 유지하거나 늘리는 반면,
중산층 및 저소득층은 더욱 저렴한 상품과 서비스를 찾으면서 소비 격차가 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유통업체 간 희비도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고가품과 명품 판매 비율이 높은 백화점과
저가 제품 전문점은 호황을 누리는 반면,
중산층이 주요 타깃인 대형 마트와 수퍼마켓 등은 직격탄을 맞았다.
◇백화점·1000원숍은 호황, 마트는 불황
소비 양극화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최근 미국 유통 기업들이 1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중산층과 서민층이 주 고객인 미국 최대 유통업체 월마트는 1분기 국내외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각각 18.2%, 33.7% 줄었다. 월마트가 운영하는 창고형 매장 샘스클럽도 영업이익이 20% 감소했다. 다른 마트 체인인 타깃도 1분기 주당순이익(EPS)이 2.19달러로 예상치(3.06달러)보다 28%나 낮았다.
실적 발표 후 두 기업 주가는 2~3일 만에 20% 넘게 급락했다. 브라이언 코넬 타깃 CEO(최고경영자)는 “경기 부양 효과가 둔화하면서 고객들이 상품 지출을 줄일 것으로 내다보긴 했지만 이 정도로 폭이 클 줄 몰랐다”며 “고객이 싸다고 느낄 수 있는 제품을 판매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 대표 백화점 체인인 메이시스는 1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78%나 늘어난 2억8600만달러(약 3550억원)를 기록했다. 고급 백화점 체인인 노드스트롬도 전년 대비 112.1% 상승한 2000만달러(약 250억원) 영업이익을 올렸다.
대부분의 제품을 1달러 정도에 판매해 ‘미국판 다이소’로 불리는 달러트리 역시 호황을 맞았다. 이 회사 1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43% 상승한 5억3600만달러(약 6650억원)를 기록했고, EPS는 2.31달러로 시장 예상치(2달러)를 훌쩍 웃돌았다. 달러트리와 비슷한 가격대의 물품을 판매하는 달러제너럴의 토드 바소스 CEO는 “저렴한 상품을 찾는 중소득층이 매장에 유입되고 있다”며 “올해 매출 증가율 전망치를 종전 2.5%에서 3.0~3.5%로 상향 조정했다”고 했다.
소비 양극화 현상은 국내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4월 국내 백화점의 소매판매액은 약 4724억원으로 전년 대비 17.3% 증가한 반면, 대형 마트와 수퍼마켓(잡화점 포함)은 각각 0.1%, 0.4%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중산층 구매력 감소
소비 양극화 현상의 원인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첫손에 꼽힌다. 미국의 경우 물가 상승률이 올 들어 7~8%대로 고공 행진하고 있지만, 민간 부문의 평균 임금 상승률은 4~5%대에 그치고 있다. 물품 및 서비스 가격이 오르는 속도를 임금 상승률이 따라가지 못하자 중산층들이 예전처럼 지갑을 열기가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소비 심리도 중산층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미시간대 조사에서 중위 소득층의 소비심리지수는 지난해 10월 72.3에서 올해 3월 61로 15.6% 하락했다. 같은 기간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소비심리지수가 각각 8.8%, 11.9% 하락한 것보다 낙폭이 크다.
그러자 중산층을 주 고객층으로 둔 대형 마트들은 자체 브랜드(PB) 상품을 늘리거나 할인 쿠폰을 발행하는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보통 1갤런(약 3.8리터) 단위로 우유를 판매하던 상점들이 0.5갤런짜리 우유를 진열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NPD가 최근 소비자 10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 80% 이상이 “더 싸고, 더 적은 제품을 구매해서 지출을 줄일 계획”이라고 답했다.
◇소비 양극화는 경기후퇴 전조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중·저소득층과 달리 고소득층은 오히려 사치품 구매를 늘리고 있다. 팬데믹 이후 막대한 돈이 시중에 풀리면서 부동산·주식 등 자산 가치가 불어난 효과를 대부분 독차지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지수 기준으로 미국 집값은 지난해부터 매달 18~19%(전년 대비)씩 오르고 있는데, 이는 팬데믹 이전보다 네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올 들어 주가가 많이 빠지긴 했지만 S&P500 지수도 여전히 팬데믹 이전 고점보다는 25%가량 높다. KB증권 김일혁 연구원은 “고정 수입이 넉넉한 고소득층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해도 평소 씀씀이를 줄일 가능성이 낮은데, 집값이 오르고 주식 배당 및 각종 이자 수입까지 늘면서 소비 여력이 오히려 커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에서 명품 등 사치품 소비는 팬데믹 이전보다 47%나 늘었다. 인플레이션이 본격화한 올해도 이런 기세는 꺾이지 않는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최근 미국의 신용·체크카드 사용 내역을 분석한 결과 올 들어 명품 등 사치품 소비는 전년 대비 1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덕분에 세계 최대 명품업체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의 주가는 지난해에만 42.3% 상승했다. CNN비즈니스가 최근 “FAANG(메타·아마존·애플·넷플릭스·구글)은 잊고 명품주에 투자하라”고 조언했을 정도다.
소비의 주축인 중산층이 무너져 소비 양극화가 심화하면 총수요가 감소해 성장률이 둔화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중산층의 구매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연세대 경제학부 성태윤 교수는 “역사적으로 봐도 소비 양극화는 경기 후퇴의 전조(前兆)인 경우가 많았다”며 “국민들의 실질 조세 부담을 낮춰주는 등 구매력 저하에 대응할 수 있는 대책을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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