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메타버스 사피엔스] [8] 현대문명이 사라진다면?
기원후 476년. 게르만족 출신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는
어린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몰아내고 ‘이탈리아의 왕’이 된다.
황제의 유물을 동로마에 보내며 그는 말한다.
이제 더 이상 제국의 왕관은 필요 없다고.
물론 ‘로마제국’ 그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수많은 동로마 제국 황제들은
과거 제국의 부활을 꿈꾸게 된다.
황제들뿐만 아니었다.
1453년 오스만 터키인들에게 함락당할 때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자신을 여전히 ‘로마인’이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마는 몰락했고, 역사에서 사라진 건 ‘로마’라는 국가만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 그 자체가 제국과 함께 멸망한 것이다.
지중해 대부분 도시들은 폐허가 되고,
대리석 신전이 있던 자리에선 소와 돼지가 풀을 뜯어먹는다.
우주의 기원과 만물의 존재를 고민하던 수학자와 철학자들은 쫓겨나고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찬란한 지식은 도서관들과 함께 불타버린다.
문명이 과연 멸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언제나 문명은 필연적으로 발전한다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분명히 이미 알았던 걸 잊고, 모두가 동의했던 것들을 포기하기도 한다.
과학기술, 정치, 그리고 개인의 양심 모두 후퇴할 수 있기에,
고도로 발전한 문명 역시 몰락하고
인류는 다시 야만과 무지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세계화’ 질서가 빠르게 무너지고
국가와 민족 간의 분쟁과 경쟁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오늘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합의가 가능했던 민주주의는
세계 곳곳에서 광적 수준의 편 가르기와 이념주의로 타락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동시에
가짜 뉴스와 비이성적 음모론이 대중의 인기를 얻기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논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장 걱정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만의 몰락이 아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과학과 이성을 뒷받침하던
현대 문명 그 자체가
역사적 몰락의 위기에 서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