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ence &] 잡스가 받았던 1억원짜리 DNA분석…이제 20만원이면 癌·치매 맞춤형 검사
■ 우리 곁으로 다가온 유전자 진단
"나는 유전자 분석으로 암을 치료한 최초의 사람이거나 이런 방법을 썼음에도 죽은 거의 마지막 사람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2011년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자신이 앓고 있는 췌장암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유전체 분석을 하면서 남긴 말이다.
당시만 해도 개인의 유전체를 분석하는 데 드는 비용은 10만달러, 우리 돈으로 1억원이 넘었다.
잡스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와 하버드대가 공동 설립한 브로드연구소에서
유전체 분석을 했고 췌장암을 일으킨 변이 유전자를 찾아냈다.
하지만 몸 상태는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같은 해 10월 사망했다.
잡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받았던 유전체 분석 기술은 이듬해부터 병원 진료에 활용되며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잡스의 투병 이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와 래리 페이지 구글 창업자는 유전체 분석 벤처기업 `파운데이션메디신`에 투자했다. 파운데이션메디신은 브로드연구소가 만든 벤처기업으로 잡스가 유전체 분석을 맡겼던 기업이다.
파운데이션메디신은 2012년부터 암과 관련된 유전자 300여 개를 분석해 환자에게 적합한 항암제를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다.
비용은 500만원 선으로 잡스가 받았던 가격과 비교하면 20분의 1로 줄었다.
신동직 메디젠 휴먼케어 대표는 "잡스 사후 유전체 진단 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함께 많은 투자가 이뤄지면서
기술 개발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며 "이제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유전체 분석을 통해 어떤 질병에 취약한지 등을 알 수 있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잡스는 우리에게 아이폰과 함께 개인 맞춤형 진료가 가능한 유전체 진단이라는 유산을 남긴 셈이다.
유전체 분석을 위해서는 세포 속에 있는 핵, 정확히 말하면 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DNA가 필요하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은 DNA로 이뤄져 있다.
DNA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으로 불리는 4개의 염기가 끊임없이 배열돼 있는 형태다.
이중 나선인 DNA 가닥이 풀리면서 유전 정보가 RNA로 옮겨진 뒤 RNA는 생명 유지에 필요한 다양한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DNA 염기 중에서 이처럼 특정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부분을 `유전자`라고 부른다.
만약 `AGGTAGGT`로 이뤄진 염기가 RNA를 거쳐 모발색을 결정짓는 단백질을 만들어낸다면 AGGTAGGT는 `모발색과 관련된 유전자`로 분류된다.
이 유전자 염기 중 하나가 다른 염기로 바뀌거나 혹은 결손이 일어나 변이가 발생했다면 머리카락 색이 달라질 수 있다.
유전체 진단은 이 같은 원리에 기반해 특정 유전자를 구성하고 있는 DNA 염기서열을 조사한다.
먼저 타액이나 모발, 혈액 등을 통해 검사를 받고 싶은 사람의 세포를 확보한다.
김태형 테라젠이텍스 이사는 "과거에는 DNA 검사를 할 때 혈액을 사용하는 것이 제일 좋았지만
기술 발달로 타액이나 면봉을 이용해 구강 상피세포를 긁는 방식을 사용해도 분석 정확도가 비슷해졌다"며
"여기서 얻은 세포를 깬 뒤 안에 들어 있는 `핵`을 추출한다"고 설명했다.
DNA는 핵 속에 있는 염색체에 존재한다. 소량의 세포만 확보해도 정상적인 DNA를 추출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렇게 얻은 DNA 이중 나선 구조를 단일 나선으로 푼 뒤 가짜 DNA라 불리는 `프라이머`를 측정하고 싶은 유전자 염기서열에 붙여준다.
프라이머를 붙이는 이유는 DNA 복제를 위해서다.
인간의 DNA는 30억쌍의 염기로 이뤄져 있는데 이를 모두 분석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인간 지놈 프로젝트 결과 인간 DNA는 99.9% 이상이 똑같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단 0.1%의 차이만 존재한다. 이런 차이로 외형이 달라지고 질병에 걸리게 된다.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특정 질병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알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염기서열 중 그 부분만 떼어내 프라이머를 붙이고 증폭시켜 여러 개를 만든다.
여러 개의 DNA를 복제하는 것은 DNA 양이 부족하면 정확한 검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특정 유전자를 구성하고 있는 염기서열을 복제한 뒤 수차례 확인을 통해 변이가 있는지를 밝혀낸다.
A, G, C, T 등 각각의 염기는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의 염색 물질로 표시돼 있는데
이를 사진으로 찍은 뒤 컴퓨터에 입력하면 염기 배열을 보다 빠르게 알아낼 수 있다.
신동직 대표는 "특정한 염기가 염색체상에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고 난 뒤
개인이 갖고 있는 유전자와 표준 유전자를 비교해 차이점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유전체 진단"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3~6일이면 끝난다. 가격 또한 개인 유전체 진단 서비스의 경우
수만 원대로 낮아지면서 유전체 분석 대중화가 성큼 다가온 상태다.
유전자에 변이가 있으면 질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유방암을 일으킬 수 있는 `BRCA` 유전자 변이를 발견하고 선제적으로 유방 절제술을 받았다.
BRCA 유전자는 세포 내에서 DNA가 손상을 입었을 때 복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암 억제 유전자다.
일반적으로 50세 미만 사람에게 BRCA 유전자 변이가 있을 경우 유방암에 걸릴 확률은 50% 정도로 알려져 있다.
BRCA 유전자가 정상인 사람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2%인 만큼 유전자 변이를 찾아보는 진단을 통해 발병 확률을 가늠할 수 있다.
졸리는 변이가 자신에게도 있음을 확인한 뒤 유방 절제술을 받았고 이를 통해 유방암 발생 확률을 5% 밑으로 떨어뜨렸다.
유전체 분석 기술은 실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
2013년 4월 미국 캔자스시티 아동자선병원에서 생후 두 달 된 아기가 간 이상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의료진은 가망이 없다고 부모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하지만 의료진이 아이와 부모 유전체 검사를 한 결과 희귀 돌연변이 유전자를 발견했다.
유전자 돌연변이 때문에 면역 시스템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서 간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의료진은 곧바로 면역 억제제를 투여했고 아이는 목숨을 구했다.
여러 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지놈 산업 규모는 2020년 20조원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인공지능, 빅데이터 기술이 융합되면서 유전체 분석 기술은 빠르게 상용화되고 있다.
미국 바이오 기업 23앤드미는 199달러짜리 간이 유전자 키트를 이용해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을 비롯한 10가지 주요 질병에 걸릴 확률을 알려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졸리가 했던 BRCA 유전자 검사도 가능하다. 한국은 2016년 6월 30일부터 `소비자직접의뢰시장(DTC)`을 허용했지만 콜레스테롤, 혈당, 혈압, 탈모, 피부 노화 등 12개 항목 46개 유전자 검사만 허용하고 정작 소비자들이 궁금해하는 치매 등의 유전자 검사는 허용하지 않았다.
김태형 이사는 "미국 DTC 시장은 지난해 유전자 검사가 1500만건 이뤄졌고, 석 달마다 100만명씩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아직 1년에 1만~2만건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 역시 개인 의뢰 유전체 분석 항목에 대해 그 수를 확대해 나가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세부 사항에 대해 정확하게 결정된 것은 없지만 관리와 규제 강화 차원에서 유전자 항목 확대를 검토할 것으로 기대된다.
■ 나도 혹시 졸리처럼?…질병유전자 갖고있다고 낙담마세요
앤젤리나 졸리의 유전체 검사 이후 `앤젤리나 효과`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유전체 검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질병을 사전에 예측해 예방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 예방적인 조치까지 가능한 만큼 개인 맞춤형 의료 시대가 열렸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당시 졸리는 유전자 BRCA를 검사했다.
BRCA에 변이가 생기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11배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부암이나 대장암, 위암 등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 유전자도 여럿 발견됐다.
치매 환자의 80%를 차지하는 알츠하이머 치매의 경우 유전적 요인이 7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치매와 연관이 높은 유전자로는 `아포이(APOE)`가 대표적이다. APOE는 뇌 속에서 발생하는 해로운 물질을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뇌 혈관에 베타 아밀로이드라는 단백질이 쌓여 발생하는 것이 치매인 만큼 APOE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혈관에 이 단백질이 쌓이면서 치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파킨슨병을 비롯해 당뇨병, 골다공증 등 많은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가 학계에 보고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유전체 진단`을 통해 얻은 결과가 `만능`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질병 관련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병에 걸린다고 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또한 질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유전자가 추가 연구결과 질병과의 상관관계가 없다고 밝혀진 사례도 있다.
2016년 8월, 학술지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에 게재된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의 논문에 따르면 일부 미국인들의 경우 10년 전 유전자 검사를 통해 `비후성 심근병증`의 발병 위험이 높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추가 조사에 따르면 해당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미국인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 확인된 만큼 위험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가족력이 있고 유전자 진단 결과 이상이 있음이 밝혀졌다면 적당한 운동과 식습관 등을 통해 관리를 해 나가는 것이 좋지만 건강한 사람인 경우 과도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전체 진단을 통해 질병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은 불안감으로 과도한 의료행위를 찾는 부작용도 나타날 수 있다.
학술지 `네이처`는 "건강한 사람의 유전체를 분석하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지적했다.
신동직 메디젠휴먼케어 대표는 "유전체 진단은 유전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알려줌으로써 건강 관리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도구"라며 "질병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과학자들의 수많은 연구가 쌓이게 되면 보다 정확한 유전체 진단이 가능해질 것"이라며
"유전체 진단은 사람이 행복하고 오래 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호섭 기자 / 김윤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