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각하는 여유/4.역사 이야기

'협상의 달인' 이완용이 결정적으로 챙기지 못한 건-이완용 평전

언제나오복의향기 2014. 7. 3. 22:34

조선일보[전봉관의 人文學 서재] '협상의 달인' 이완용이 결정적으로 챙기지 못한 건

  •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 기사입력 : 2014.01.18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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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용 평전(김윤희 지음,한결례출판)/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의 서평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
    이완용(1858~1926·사진)은 한학을 공부해 25세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서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추사 김정희에게 필적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근대적 외국어 교육기관 육영공원이 설립되자, 현직 관리 신분으로 입학해 영어를 공부했다. 주미 공사관 참찬관으로 3년 남짓 미국에 주재하며 대리공사까지 지냈다. 귀국 후에는 친미파로 개화 관료와 구미 외교가 사교 모임인 정동구락부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그는 영어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고, 공문까지 작성할 수 있었지만, 일본어를 배우지는 못했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친일파가 주도한 정부에서 친러파와 연대해 '야당' 역할을 자임했다. 독립협회 결성을 주도해 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했다. 독립문 건립 때 가장 고액의 기부자가 그였다. 이설(異說)이 없지는 않지만, 지금 남아 있는 독립문의 현판 글씨가 그의 필적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에서는 드문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이라는 평가도 들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본 손아귀에서 고종을 구출하기 위해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을 주도했다
          이완용.               
	이완용.
               
    그랬던 그가 을사늑약,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 체결을 주도하며 친일파의 거두로 변신해 나라를 팔아먹은 원흉으로 전락했다. 그의 놀라운 변신을 남다른 처세술이나 권력욕 등 개인의 도덕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완용 평전'(김윤희 지음, 한겨레출판)은 그 원인을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라는 그의 정치적 신념에서 찾는다. 조약 체결을 거부할 힘이 없다면, 더 나은 조건으로 체결될 수 있도록 협상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는 것이 그의 일관된 정치적 신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치적 신념에 따라 그는 을사늑약의 원안을 조정해 대한제국이 부강해지면 외교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고, 한일합방조약의 원안을 변경해 황제를 공(公)이 아니라 왕(王)으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매국노라 비난했지만, 그 자신은 죽는 날까지 '왕실을 보존한 충신'이라고 자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으므로 이완용이 아니라 그 누구도 망국적 조약을 체결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완용의 오류는 조약 체결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는 조약의 협상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으로 정치에 뛰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치의 본질적 기능은 대화와 타협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협상에 끼어들어 더러운 이름을 만대에 전할 필요는 없었다. 나라에 치명적인 손실을 끼치는 협상이라면, 비록 원안보다 나은 조건으로 협상을 이끌었더라도 비난을 피해갈 수 없음을 이완용의 삶이 보여준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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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용 평전에 대한 서평을 읽고, 역사의식과 국가라는 조국을 다시 생각해보다.

    이완용에대해 그냥 막연하게 매국노라는 생각으로,

    당시 시대상황은 전혀 이해하지 않고 매도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든다.

    그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 공동책임이 있지않나 생각해본다.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그 끔찍한 사고가 어디 선장과 유병헌이라는 구원파 교주만의 책임일까.

    그역시 우리 사회의 공동의 책임이라고 본다.

     

    사람의 몸에 병이 생기면,  종기가 생기거나 어딘가 통증이 온다.

    사회나 국가도 마찮가지 어딘가 곪고,부패하면, 그병의 증상이 각종 사고나 사건으로 드러난다.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요, 하늘의 꾸짖음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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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이완용평전에서 말한다.

    처음부터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으로 정치에 뛰어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치의 본질적 기능은 대화와 타협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협상에 끼어들어 더러운 이름을 만대에 전할 필요는 없었다-라고 썼다 

     

    -  그렇다면 그 더러운 욕은 누군가는 짊어져야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라는 현실도 있을까.

    3 D업종을 모두가 싫어한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나서,

    싸는 똥을 치우는 사람,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이 없는

    쓰레기 더미와 거리마다 똥 오줌으로 질퍽한 길을 걸어야 된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나름대로  모두가 고마운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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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완용(1858-1926)

    이완용 사주   乙 辛 己 戊  乾命

                  未 亥 未 午  7大運 

         丙乙甲癸壬辛庚

        辰寅丑子亥戌酉申

             

     신금辛金 일주로 늦여름 미未월 편인을 타고 있어 부드럽고 인자한 성격을 기본이다.

     

    여름철 뜨거운 기운을 타고 나서 강직함도 갖추었다. 이런 점은 평상시에는 그대로

    이성격을 이어간다.

    그러나 사태가 변하여 상황이 바뀌면 편인의 임기응변적인 기질이 발휘된다.

    거기에 더하여 일지 상관이 편인과 함께 작용하여 위기상황에서 대처을 아주 잘해나간다.

    또 지지에 목국으로 합이되어 협상능력을 탁월하게 발휘한다.

    을목 재성이 지지에서 합을 이루고, 천간에 투간까지 되어 큰 재물까지 갖추었다.

    당대 이완용 개인으로서는 오복을 다누리고 사는 명命이지만

    역사의 평가는 개인적인 명성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1926년 丁卯대운 丙寅운에 삶을 마쳤다. 관살대운 官鬼運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을축乙丑운까지는 서북운으로 좋았으나 병인운부터 어려워 오랜 병고에 시달린 것이

    아닌가 싶다. --명命보다는 행운行運이 좋는 사주같다.

     

                   오복작명철학관.                                               -  택일, 궁합, 작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