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생각하는 여유/4.역사 이야기

조선왕조의 모순 비판은 친일(親日)수 없다. 식민지 사관을 극복하는 과정일뿐

언제나오복의향기 2014. 6. 25. 22:03

 

 

[삶의 향기]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중앙일보] 입력 2014.06.24 02:30 / 수정 2014.06.24 02:30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한국학의 필독서다. 1890년대 중반 노령의 비숍은 오랜 탐방을 거쳐 직접 조사한 조선의 실상을 여행기로 정리했다. 1964년 시인 김수영은 이 책의 일부를 번역하면서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한 귀중한 문헌”이라 평했다. 같은 해 발표된 시 ‘거대한 뿌리’에서 그는 스스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고 썼다. 그가 비숍의 기록을 통해 본 ‘거대한 뿌리’는 무엇일까.

 120년 전 비숍이 보았던 조선은 가난하고 무력한 나라였다. 조선인들은 대부분 초라한 움막에서 극빈하게 살았다. 인구 25만의 수도 서울은 베이징에 이어 세계에서 둘째로 더러운 도시였다. 비좁은 골목길 옆으로 초록빛 오물이 흘렀고, 굶주린 개떼가 어슬렁거렸다. 여자들은 온종일 남자들의 백의(白衣)를 빨고 삶고 풀칠하고 다려야만 했다. 그런 풍습은 비숍에겐 여성노예제(female slavery)로 보였다. 저녁 8시 보신각 대종(大鐘) 소리에 맞춰 모든 남자의 통행이 금지되던 ‘기이한 습관’의 나라, 김수영의 시구처럼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던 극적인” 서울이었다.

 급류를 헤치며 한강의 뱃길을 둘러본 비숍은 조선의 절경에 경탄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줄곧 일반 백성의 비참한 생활상에 머물렀다. 표독스레 담뱃대를 뻑뻑 빠는 양반들과 백성의 고혈을 짜는 아전들을 묘사한 장면을 읽노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양반은 담뱃대도 직접 들려 하지 않았고, 양반집 아들들은 서당에 갈 때도 책조차 손수 들고 가지 않았다.” 지주와 아전들은 강압으로 인민의 재산을 빼앗았고, 저항하면 투옥시키고 곤장을 쳤다.

 사람들은 틈만 나면 취하도록 막걸리를 마셔댔다. 양반들은 양주까지 구해 마셨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어도 욕될 것 없던 ‘술 권하는 사회’였다. 요컨대 비숍이 기록한 조선 말기의 사회상은 처참했다. 열강의 틈에서 위기로 내몰린 정부는 무력했다. 사욕에 찌든 지배층은 잔혹했다. 연약한 백성들은 의욕을 상실하고 나태와 무기력에 내몰렸다.

 유교 경전에 ‘천명미상(天命靡常)’이란 말이 있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하늘은 백성의 눈과 귀를 통해서 보고 듣는다.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하늘은 천명을 거둬 다른 조대를 연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즉 반란에 의한 왕조교체를 정당화한 유가의 정치이론이다. 유가경전에 기록된 고대의 독재자들은 모두 정치혁명의 결과 처형되었다. 유교의 원칙으로 보면, 조선은 마땅히 무너져야 할 나라였다.

 신해혁명은 중국 현대사의 꽃이다. 쑨원(孫文)이 내건 공화정의 깃발 아래 반란군은 청조를 무너뜨리고 황권을 해체했다. 그 정치혁명으로 중국은 자력으로 ‘민국(民國)’의 시대를 열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혹독하리만큼 철저하게 전통을 비판했고, 왕조사의 어둠을 고발했다. 유교는 식인(食人)의 이념이라 폄하되었다. 마지막 황제는 옥살이를 면치 못했다. 불행히도 조선의 인민은 ‘민국’의 혁명을 이루지 못했고, 단명한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김수영은 참혹한 조선 말기의 사회상을 보면서 정신적 방황을 거쳐 울부짖었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 부정의 부정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본 것인가. 거대한 뿌리를 발견한 김수영은 조선의 그 “더러운” 역사를 직시했던 것이리라.

 조선왕조 비판은 친일(親日)일 수 없다. 왕실의 안전만을 보장받고 나라를 일제에 팔아 버린 조선의 지도부를 옹호하는 것이야말로 친일이 아닐까. 시카고대학의 커밍스 교수는 북한정권이 조선조의 연장이라 주장한다. 그의 진단대로라면 한반도에서 조선조는 여전히 지속되는 셈이다. 즉 조선의 극복은 현재진행형의 과제다. 식민사관을 넘어서기 위해선 조선왕조사의 모순과 한계를 철저히 비판해야만 한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정문에는 철학자 산타야나의 명언이 새겨져 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국민은 그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비숍 여사가 노구를 이끌고 조선의 산천을 여행했던 이유일 것이다.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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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민지사관의 극복은 조선 왕조사의 비판에서 출발해야한다". 송재윤 교수주장은 참으로 신선하다.

오늘날 우리를 만든 "거대한 뿌리"를 직시해야한다고---

--그뿌리라는 것이 조선왕조-일제식민지-그리고 오늘의 한국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