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거울 <2> 크세노폰과 키루스 대왕
크세노폰 ‘현실 속 군주를 보라’
크세노폰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서 용병대장 참전으로 고향에서 추방당하는 등 생존을 위한 질곡의 삶을 살았다. 그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의 군주의 모습을 통찰하고 키루스 대왕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왕 중의 왕’ 키루스 대왕을 배워라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이교도 왕이면서도 유대인을 해방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게 한다. 절제와 온화함, 관용까지 갖춘 키루스는 서구 문명사에서 위대한 ‘왕중의 왕’으로 칭송받고 있다.
크세노폰, 격동과 혼란의 시대를 바라보다
크세노폰(Xenophon)은 기원전 430~425년 사이에 태어나서 기원전 355~350년 사이에 죽은 그리스의 역사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고, 스승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감옥소에서 독배를 들고 최후의 임종을 맞이한 시기를 살았으니 격변의 시대를 산 사람이다.
조국 아테네 사람들이 철학이 사라진 시대의 우울함에 빠져 있을 때,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고원을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가는 것’을 그리스어로 ‘아나바시스(anabasis)’라고 하는데, 그는 페르시아 내전에 용병대장으로 참전하여 고지를 행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만인대(萬人隊)의 지휘관으로 페르시아 고원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우리 인생도 ‘아나바시스’를 지향한다. 더 높은 자리를 향해서,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높아지는 내일을 향해 ‘올라가는 것’을 원한다.
크세노폰의 꿈도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출세의 길이기 전에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페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그리스 용병을 고용한 페르시아의 소(小) 키루스는, 기원전 401년 9월에 페르시아의 정예군과 맞붙어 전사하고 말았다.
지휘관으로 선출된 크세노폰은 그리스군으로 구성된 만인대를 이끌고 생존의 탈출을 시도한다. 고향 아테네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차라리 더 깊은 페르시아의 내륙으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용병들이 흑해(Black Sea) 인근에 설립한 식민도시로 탈출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그들은 같은 그리스인이 아닌가. 천신만고 끝에 스파르타인들의 식민도시에 도착했지만, 그들이 경쟁국가인 아테네의 용병대를 환영할 리 없었다.
다시 곤경에 처한 크세노폰의 군대는 생존의 길을 찾아 때로 페르시아의 용병이 되기도 하고 때로 스파르타의 편이 되어 싸우기를 반복했다.
크세노폰은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와 친교를 맺고, 기원전 394년 함께 그리스로 귀환한다. 스파르타의 내란 때문이었다.
함께 그리스로 귀환한 크세노폰은 꿈에 그리던 고향 아테네로 돌아왔지만, 추상과 같은 추방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국 아테네의 반역자로 몰려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테네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고 갔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 때 적국 아테네를 지원한 페르시아의 소(小) 키루스 아래에서 용병대장을 역임했다는 전력 때문이었다.
페르시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행적도 아테네 시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과 스파르타 간 내전이 발발했을 때, 크세노폰은 스파르타 진영에 가담했다.
결국 그는 고향 아테네에서 조국의 배신자가 되었고, 다시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의 배려로 올림피아 부근에서 여생을 보내며 집필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이때 쓴 책이 바로 그리스 최고의 ‘군주의 거울’로 평가받던 《키루스의 교육》이다.
군주의 피할 수 없는 현실 다룬 ‘키루스의 교육’
크세노폰은 격동의 시대를 산 인물이다. 정국이 혼란하면 사람들의 생각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조국 아테네에서 현자 소크라테스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격동과 혼란의 와중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 두 명은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이름 다음에 붙어, 서양 철학사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플라톤은 아테네 근교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열고, 제자들과 함께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시대의 격동과 혼란에 직접 자신의 몸을 던졌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서,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의 사이에서, 그는 스스로 주변인(周邊人)임을 자처한 것이다.
무릇 경계선에 서 있는 주변인에게서 새로운 통찰력이 나오는 법이다. 크세노폰은 추방의 쓴 잔을 홀로 마시면서, 험난하던 시대의 질곡을 통찰했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에서 현실적인 지도자의 이상적인 모습을 고안해냈다.
한 사람이 철학과 관념의 세계에 머물렀다면, 또 다른 한 사람은 페르시아 고지를 1만 1000명의 용병대원과 함께 오르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한 사람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강조했다면, 또 다른 한 사람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왜 사람들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지,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쳤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은 엄정하고 냉혹한 현실을 다룬다.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 손에 피를 묻혀야 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사랑하는 부하를 읍참마속(泣斬馬謖)해야 하는, 군주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를 다룬다.
왕 중의 왕, 키루스 대왕
그렇다면 크세노폰이 후대 사람들에게 ‘군주의 거울’로 삼으라고 제시한 키루스 대왕(기원전 576~530년)은 어떤 사람일까? 크세노폰을 고용한 페르시아의 군주를 소(小) 키루스로 부르는데, 이 사람의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바로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이다. 때에 따라서 대(大) 키루스로 부르기도 하고, 키루스 2세(Cyrus II)로 부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키루스 대왕’으로 칭하기로 한다.
키루스는 위대한 왕이었다. 그는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에서 ‘왕 중의 왕’으로 불렸다. 한 사례를 들어보자. 유대인은 특유의 선민사상 때문에 고대 근동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할거하던 여러 나라의 왕을 무조건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전능하고 유일한 여호와 신을 경배하지 않고, 금신상이나 여신을 숭배하던 이교도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명, 예외가 있었다.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고레스로 번역됨)는 그가 비록 이교도의 왕이었지만 ‘여호와께서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의 사자다(이사야 45장 1절). 유대인이 바빌로니아의 포로 신세로 전락해 있을 때, 그들을 해방시켜주고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만든 왕이 바로 키루스 대왕이기 때문이다.
키루스 대왕은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도록 만든 장본인으로 언급된다(에스라 1장 1~3절). 타민족에게는 유난스럽게 배타적이던 유대인이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는 이교도의 왕 키루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왜 서구 문명사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전형으로 소개되어 왔을까?
《키루스의 교육》 이외에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가장 탁월하게 그린 작품은 단연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비록 약 2000년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 탁월한 군주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을 상당부분 차용하고 있다.
요즈음과 같은 기준으로는 《군주론》이 《키루스의 교육》을 표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내용과 핵심 주장에서 두 책은 닮아 있다. 남의 글과 생각을 표절하면서도 뻔뻔스럽게 이를 부정하는 요즈음 철면피들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표절 혐의를 《군주론》에서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두뇌를 써서 훈련하기 위해서 군주는 역사물을 읽고, 그를 통해서 위인의 행적을 연구해야 한다. 전쟁을 치른 데 있어서 위인들이 어떻게 지휘했는지 알아보고, 그들의 승패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검토하여 하나의 모범을 삼아야 한다.
그 위대한 인물 역시 그들 이전에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영광을 누린 위대한 인물을 모범 삼아 그 행동과 업적을 항상 좌우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로스는 아킬레우스를,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스키피오는 키루스를 모범으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 왕의 전기》를 읽으면, 스키피오의 일생은 키루스 왕을 얼마나 훌륭히 모방하였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스키피오가 절제와 온화함, 인간미와 관용 면에서 크세노폰이 묘사한 키루스 왕과 얼마나 닮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총명한 군주는 당연히 이런 위대한 인물들의 태도를 존중해야 한다. 평상시에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노력하고 실천하여 역경에 처했을 때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한다. 즉 운명이 뒤바뀌었을 때도 운명을 견디어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후대 군주들에게 키루스를 모범으로 삼던 스키피오 장군을 예로 들면서, 절제와 온화함, 인간미와 관용의 측면에서 우리도 키루스 대왕을 닮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왜 키루스 대왕은 서구 사회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칭송받아 왔을까? 왜 스키피오 장군은 키루스 대왕을 닮아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을까? 왜 마키아벨리는 키루스의 모범을 따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 연재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김상근 =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16세기 동서양 문화사상의 원류를 찾기 위해 르네상스 예술로 표현된 유럽의 시대정신을 추적하며, 동서양 역사를 단면으로 잘라 신대륙의 발견, 르네상스 예술,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동서문화 교류사 등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저자의 ‘르네상스와 창조성’ 강의는 SERI CEO 등에 초대되며 최고경영자들 사이에서 놓쳐서는 안 될 최고 인기강의로 손꼽히고 있다. 저서로는 《인문학으로 창조하라》 《마키아벨리》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 창조경영》 《르네상스 명작 100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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